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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대교구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는 신유박해 200주년(2001)을 앞두고 매달 절두산 순교성지에서 '신유박해 200주년 특강'을 마련하고 있다. 지난 6일 일곱 번째로 열린 '주문모 신부 사건을 통해서 본 한중 관계'에 관한 여진천(원주교구 배론성지) 신부의 특강을 요약 소개한다.<편집자>


1784
년 이승훈의 세례 이후 신앙공동체를 구성한 조선 교회는 사제의 필요성을 깨닫고 성직자 영입운동을 벌여 중국인 주문모 신부의 입국을 성사시킨다. 그러나 1801년 신유박해로 주문모 신부가 체포되자 대왕대비는 그의 처리문제를 놓고 여러 차례 논의를 했는데, 그것은 그가 중국인이었기 때문이다
.

대왕대비 김씨는 주문모 신부의 처형과 관련해 네 차례에 걸쳐 대신들과 논의했다. , 1801 312일 주문모 신부가 체포된 이후 16일과 27일에, 1015일 황사영의 체포 이후 백서 전달자로 예정됐던 옥천희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1027일 중국에 주문(
奏文, 임금에게 알리는 글)을 보내는 것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주 신부 문제를 논의했다
.

주문모 신부를 처형한다면 중국으로부터 말을 들을 것을 근심한 대왕대비는 3월에 대신들과 두 번의 논의를 거쳐 중국에 주문을 보내지 않은 채 419일 주 신부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처형했다. 그러나 10월 초 황사영이 체포되고 백서 전달자로 예정됐던 옥천희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옥천희가 중국에 다녀온 사실을 알게 되자 대왕대비는 주문모 신부의 처형 사실이 중국에 알려졌을 것으로 생각하고 중국에 주문을 보내 외교적으로 잘 대응하라고 요구했다
.

그리하여 1801 12월 조윤대를 중심으로 하는 동지사 일행은 중국 예부에 사건의 전말을 알리는 '토사주문(
討邪奏文)'을 제출했고, 중국 황제 가경제는 이에 대한 답으로 '토사주복(討邪奏覆)'을 조선에 전달했다
.

주문모 신부의 죽음에 대해 대왕대비가 그토록 청나라에 대해 두려움을 가졌던 이유는 조선 정부의 정치적 변화와 천주교 정책의 변화 때문이다
.

갑작스런 정조의 죽음 이후 어린 나이의 순조가 즉위하자 수렴청정으로 정권을 잡은 대왕대비는 자신의 정치적 기반이 약했기에 정권 유지에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확실한 지지 기반을 만들 사이도 없이 정권을 잡은 대왕대비는 주 신부 사건으로 말미암아 중국으로부터 정치 외교적인 압력을 받을 위험과 이에 대한 두려움을 가진 것이다
.

또 정조대의 천주교 정책인 교화 우선 정책을 벗어나 천주교에 대해 정치적으로 파악하고 천주교인을 박해하는 강경책을 사용했다. 그렇기에 주문모 신부의 자수 이후 그에 대한 처리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그가 중국인임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문을 보냈을 경우 더 큰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는 대신들의 의견에 따라 죽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그러나 조윤대를 통해 주문모 신부의 죽음을 알게 된 중국은 조선이 그토록 염려했던 주 신부에 대한 언급없이 다만 북경 거주 선교사들과 조선교회와의 관련을 부정하면서 두 나라 국경에서 경비를 철저히 하도록 하는 수준에서 마무리 지었다
.

중국의 이러한 입장은 당시 황제였던 가경제의 천주교 정책에서 드러난다. 그는 역대 황제들처럼 서양 선교사들은 우대하지만, 천주교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았기에 박해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래서 자국인이라 하더라도 주 신부의 죽음에 대해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또 당시 중국 정부에서 볼 때 주 신부는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주문을 통해 주 신부의 죽음을 알면서도 외교적으로 문제를 삼지 않았던 것이다
.

결국 주문모 신부 사건은 조선 정부의 대왕대비와 대신들의 걱정과는 달리 중국 정부에서 문제화하지 않음으로써 외교 문제가 일어나지 않은 사건이었다
.

<
평화신문, 2000 9 10일 연중 제23주일, 594, 정리>


  1. 주문보 신부사건을 통해본 한중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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