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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04 21:26

한국 천주교회사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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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흥선 대원군과 병인 박해 (고종3 1866)
 
병인 박해란 고종3년 즉, 1866년에 벌어진 교난을 말하는 것이다
.
고종8년인 1871년까지 전후 6개년간의 박해이며 공식적으로 기록된 순교자 수만도
2천여명이나 되며 비공식적으로 살육당한 신자 수까지 합하면 8천여명의 희생자를 낸 대 박해 사건이며 우리 교회 사상 일대 시련 이었다.
대원군 아니, 흥선 대원군 그 정식 이름은 이하응 이라는 분이다
.
집권케 되는 것은 1863년 말에 철종이 후사없이 승하하게 되자, 이하응의 둘째
아들이 나이 불과 12살에 왕위에 오르게 됨으로서다.
이 국왕이 바로 고종이며 국왕이 유소하매 흥선 대원군이 정권을 잡고 이후
민비를 중심으로한 민씨 일파의 공작으로 양주( )로 하야( )할 때까지 전후 10년간 집권자로 행세하였다.

대원군의 천주교에 대한 두가지 추측

호감을 가졌다고 추측되는 내용

 
첫째 : 승지 남종삼과의 문답 즉 천주교회에 관해 문답할때 그로
부터 천주교의 교리를 설명받음. (제사에 관한 문제에만 의심을.......)
 
둘째 : 대원군의 부인인 민부 대부인의 천주교 동경자였다는 사실

 
셋째 : 그 유모가 일찍부터 천주교인 이었다는 사실

 
넷째 : 대원군의 맏딸인 이씨부인이 천주교도였다는 그 자손들의 주장

포악한 탄압령을 내려 8천의 생명을 희생시키게 되었던 일반적인 사유
 
첫째 : 보수적이며 포악하고 잔악한 성품이 그릇된 정세를 판단한점

  
둘째 : 러시아 세력 남침에 따른 외교정책의 난 문제

  
셋째 : 대원군의 면회 신청에 즉응하지 못했던 교회의 사정

 
넷째 : 유고적 양반 세력과 조 대왕대비 일파의 음모공작
.
 
다섯째 : 청국에 있어서의 천주교 박애 운동

대원군이 후세에 가장 비난받은 이유는 천주교인의 대량 학살은 그가 교리에 대한 몰이해나 천주교에 대한 반감보다도 제정 러시아의 남침이 중요한 동기가 된다. 대체로 대원군이 천주교회측과 교섭을 가지게 된 것은 러시아 남침에 대비키위한 셈이었다.
병인박해는 병인양요를 초래했다
.
그러나, 프랑스 군이 대패로 끝나자 대원군은 더욱 의기양양해서 척화비를
세우고 천주교도인의 색출은 더욱 격심해 졌다.
그런 흥선 대원군도 정계에서 물러난 후로는 점차 천주교에 대한 심경에
변화가 생겨나 그의 말년인 1896 10월에 괼아라는 영명으로 영세할때 반대하지 않고 묵인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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