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아이디는 등록된
본인의 메일주소를 입력하세요.
로그인


2009.04.04 21:20

한국 천주교회사 (2)

조회 수 436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4. 신해박해 (정조15년 서기1791)
 
한국 천주교회사는 한마디로 박해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
박해의 원인은 크게 두가지로 말할 수 있겠다
.
첫째, 천주교가 제사를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미풍양속을 해치는 그릇된 사교인점
.
둘째, 당파 싸움과 연결된 정치적인 이유이다
.
신해박해(진산사건) 1791년 전라도 진산지역 양반이었던 교우 윤지충(바오로) 사건으로 잘 알수있다
.
유교 전통에 의하면 부모가 세상을 떠나면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바쳐야함은 천민까지도 아는 일이었다
.
그런데, 윤지충과 그의 외종형인 권상연 야고보는 신주를 불태워 버리고 천주교예식으로 장례를 치르려했다
.
가족들과 동네 사람들로부터 불효 막심한 놈이라는 비난을 받으며 그는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받게 된다
.
이 사실을 관가에서 알게되자 체포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이사실을 알고 바오로 와 야고보는 충남 땅으로 피신할수 있었다

윤지충 집을 수색하던 관헌들은 본인들을 찾지 못하자 윤지충의 작은 아버지를 잡아 가두었다
.
모진 고문속에 작은아버지가 잡혔다는 소식을듯고 윤지충과 권상현은 관가에 나가 자수하였다
.
당대 최재공은 남인들의 보호를 위하여 사형 명령을 내렸고 정조 또한 사형을 명했다 사형취소 칙사를 보냈으나 이미 둘은 순교한 뒤였다

그해가 바로 1791 12 8일 전주 감옥에서 순교했다. (바로 정조15년인 서기 1791년의 일이다
.)

5. 주문모 신부의 입국과 전교 (정약종,최인길,최창헌 등)
 
주문모(야고보) 신부는 중국 소주 출신이다
.
그는 어려서 부모님을 여의고 할머니 슬하에서 자랐으며 품행이 단정하고,온순하였다

나이가 차자 결혼을 하었으나 3년만에 부인이 자식없이 사망하였다
.
이를안 주교님께서 그의 품행을 보고 추천 함으로서 신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
북경에서 설립된 북경신학교 학업을마치고 제1회 졸럽생으로 신부가되었다
.
1794
12월 주신부는 동지사 틈에 끼여 간교우 지황(사바)과 윤유일(바오로)을 만나서 23일 밤중에 역부차림으로 얼어붙은 압록강 얼음을 타고서 무사히 입국에 성공했다
.
서울에 도착한 주신부는 역관 출신 최인길(마티아) 집에 머물며 한국말을 배우며 성무집행을 하였으나
그때 배교자였던 한영익이 주문모 신부의 입국사실을 관헌에 고발하여 체포령이 내려졌다
이를 미리알게돎 최인길 의 집을 빠져나왔다
.
그리고 주문모 신부님은 강완숙 골롬바 집에 머물게 된다 (양반집 딸). 강완숙 골롬바는 홍지영의 후처로 살다가 이혼한 뒤 였다

강완숙은 그의 시어머나,본처의 아들 홍지철도 강완숙을 따라 함께살고 있었다
.
강완숙이 과부라는 사실 때문에 검문을 피해 성무집행을 할수있게되었다.(6여년 동안) 한편, 지황과 윤유일은 체포된 뒤 고문끝에도 주신부의 거처를 말하지 않았고 1795 6 25일 매를 맞고 순교하였다.(최인길 역시 장살로 순교함
)
주신부는 자신 대문에 박해 당한다고 생각하고 고국으로 돌아가려다 으금부로가 자수를 하였고 새남터에서 칼을받고 장렬하게 순교하심.(군문효수
)
당시 주신부과 초대 여회장(강완숙 골롬바) 크게 활약하던 당시 천주교 신자수는 4,00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
그의 아들 홍필주와 시어머니를 입교시킴.


  1. 주문보 신부사건을 통해본 한중관계

    서울대교구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는 신유박해 200주년(2001년)을 앞두고 매달 절두산 순교성지에서 '신유박해 200주년 특강'을 마련하고 있다. 지난 6일 일곱 번째로 열린 '주문모 신부 사건을 통해서 본 한중 관계'에 관한 여진천(원주교구 배론성지) 신부의 ...
    작성일 2009.04.04 작성자 사목회장 조회수 719
    Read More
  2. 한국 천주교회사 (7)

    103위 순교성인 낳게한 박해시대 상황 - 유학과 상반된 사학으로 배척 ◎ 박해의 배경, 신유박해 박해는 교회를 정화하고 신앙을 담금질하는 '용광로'다. 103위 한국 성인들은 모두 박해로 치명한 순교자들이다. 1784년 조선에 첫 가톨릭 신앙공동체가 탄생한 ...
    작성일 2009.04.04 작성자 사목회장 조회수 431
    Read More
  3. 한국 천주교회사 (6)

    9. 흥선 대원군과 병인 박해 (고종3년 1866년) 병인 박해란 고종3년 즉, 1866년에 벌어진 교난을 말하는 것이다. 고종8년인 1871년까지 전후 6개년간의 박해이며 공식적으로 기록된 순교자 수만도 2천여명이나 되며 비공식적으로 살육당한 신자 수까지 합하면 ...
    작성일 2009.04.04 작성자 사목회장 조회수 485
    Read More
  4. 한국 천주교회사 (5)

    8. 기해박해 (헌종5년 서기 1839년) ( 1838년부터 1840년까지 3여년에 걸친 박해 ) 1834년 재위 34년 만에 순조가 돌아가시고 불과 8세의 어린 몸으로 왕위에 오른분이 바로 헌종이다. 국왕이 나이가 어려 순조비였던 순원왕후의 수렴정치가 시작되었고, 처참...
    작성일 2009.04.04 작성자 사목회장 조회수 399
    Read More
  5. 한국 천주교회사 (4)

    7. 정해교난 (순조27년 서기1827년) 정해교난이란 순조27년 음력 2월부터 5월말까지 전,후 넉달에 걸친 교회박해를 지칭하는 것인데 이 박해는 중,고등학교의 교과서에는 나오지도 않으니, 그만큼 이 박해에 대한 인식이 적고 또 알려져 있지 못한 박해이다. 1...
    작성일 2009.04.04 작성자 사목회장 조회수 501
    Read More
  6. 한국 천주교회사 (3)

    6. 신유대박해 (순조1년 서기1801년 - 1802 1년) *** (초대 교회지도자들의 순교) *** 정조가 24년간의 재위끝에 세상을 떠나게 됨으로써 대통을 잇게된 분이 순조였다. 그러나, 그는 열한살의 어린나이어서 궁중에서 가장 어른은 경주 이씨 가문의 김대비가 ...
    작성일 2009.04.04 작성자 사목회장 조회수 460
    Read More
  7. 한국 천주교회사 (2)

    4. 신해박해 (정조15년 서기1791년) 한국 천주교회사는 한마디로 박해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박해의 원인은 크게 두가지로 말할 수 있겠다. 첫째, 천주교가 제사를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미풍양속을 해치는 그릇된 사교인점. 둘째, 당파 싸움과 연결된 정치...
    작성일 2009.04.04 작성자 사목회장 조회수 436
    Read More
  8. 한국 천주교회사 (1)

    1. 이땅에 처음 발을 디딘 신부 1593년 12월 27일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고니시 유키나가(아우구스티노) 거느린 군인들을 위해 파견된 포르투칼인 세스페데스(cespedes) 군종신부 였다. 최초로 이땅에 발을 디딘 신부이나 한국 교회를 위해 남긴것은 하나도 없...
    작성일 2009.04.04 작성자 사목회장 조회수 366
    Read More
  9. 한국교회(3)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 가난했던 선교사들의 삶 조광(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 우리나라의 천주교 신자 대부분은 교회 창설 초기부터도 매우 가난한 상황에 처해있었다. 초기교회의 신자들은 “조선이 세계 여러 나라가운데 가장 가난하고, 신자들은 조선...
    작성일 2009.04.04 작성자 사목회장 조회수 354
    Read More
  10. 한국교회(2)

    [우리 교회의 초상] 한국 교회사는 한국사의 일부인가 이찬수 한국사적 의미를 읽어낼 수 없는 한국의 그리스도교 언젠가 한국의 그리스도교는 한국의 전통적 종교문화를 어떻게 보아왔는지, 지난 200여 년간의 역사를 공부하며 정리한 적이 있다. 요지는 가톨...
    작성일 2009.04.04 작성자 사목회장 조회수 323
    Read More
  11. 한국교회(1)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 박해시대의 기도문 조광(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 일찍이 교부 오리게네스는 기도란 “하느님의 현존을 의식하여 그분과 대화하고 그분을 바라보는 것”이라 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도 기도는 ‘하느님과 대화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작성일 2009.04.04 작성자 사목회장 조회수 512
    Read More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Next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