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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04 21:02

한국교회(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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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 가난했던 선교사들의 삶
                                                                                    
조광(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

 
우리나라의 천주교 신자 대부분은 교회 창설 초기부터도 매우 가난한 상황에 처해있었다. 초기교회의 신자들은조선이 세계 여러 나라가운데 가장 가난하고, 신자들은 조선사람 중에서도 제일 가난한 사람들이다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들에게 가난은 하나의 숙명처럼 인식되어 있었고, 원래 가난했던 이들에게 가난은 생활이지 미덕이 아니었다
.

그러나 조선에 복음을 전하려고 만난을 무릅쓰고 입국한 선교사들은 원래 가난했다기보다는, 복음적 덕행 가운데 하나로 가난을 실천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그들의 의식주 생활에 대한 관찰을 통해서 청빈을 실천하던 그들의 절제된 생활을 확인하게 된다
.


박해시대 선교사들의 가난한 생활


 
박해시대 조선교회의 선교 책임은 파리외방전교회의 선교사들이 맡았고, 조선교구의 초대 교구장은 브뤼기에르 주교였다. 그는 조선에 파견된 첫 번째 서양인 선교사로서, 조선에 입국하려고 중국 광퉁(廣東)을 출발하여 중국대륙을 거슬러 올라가며 저쟝성(浙江省)을 지나고 있었다. 그는 대운하를 타고 일단 베이징을 향해 가다가 1833 5 15일 오후 5시경에 중국인 교우촌에 이르렀다. 교우들은 이튿날 예수 승천 미사를 집전해 달라고 청했고, 그는 그 마을에 머물게 되었다. 이때의 체험담을 브뤼기에르 주교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중국인 회장 한 사람이 내 옷이 너무 소박한 것을 눈여겨 보았습니다. 중국인 회장은그런 옷을 입고 미사를 어떻게 봉헌하십니까. 교우들이 이상한 눈으로 볼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다른 옷이 없는데 어떻게 하겠소.’ ‘옷을 사셔야지요.’ ‘돈이 없는데요.’ ‘꾸어드리지요.’ ‘그걸 언제 갚게요.’ ‘이 다음에요.’ ‘나는 영영 갚지 못할 것같이 생각됩니다. 아직 내 수중에 남아있는 얼마 안 되는 돈은 이보다 더 필요한 일에 쓸 작정이오. 굶어 죽는 것보다는 좋지 못한 옷을 입는 것이 낫습니다.’ 그러나 교우들은 내가 내세우는 핑계들을 받아주지 않아 그곳 회장은 자신의 예복을 내게 빌려주었습니다
.”

조선을 향한 장도에서 브뤼기에르 주교는 갖은 어려움을 다 겪었다. 그 어려움 가운데 일부는 그가 직면했던 재정난 때문이었다. 그는 조선의 입국 과정과 선교 중에서 소요될 최소한의 비용들을 준비하고자 푼돈이라도 아껴 써야 했다. 그는 단 한 푼의 돈이라도 허투루 쓸 수 없었으므로 철저한 절약생활을 했다. 그는 조선에 입국하지 못하고 내몽고 지방에서 죽었지만, 그가 겪고 실천한 가난한 삶은 그의 후배 선교사들에게도 이어졌다
.

가난을 달게 견디어낸 박해시대 선교사들의 생활은 1866년의 순교자 베르뇌 주교에게서도 마찬가지로 드러난다. 베르뇌 주교와 함께 선교하다가 살아남아 그의 삶을 증언했던 칼레 신부는 당시 천주교 조선교구장 베르뇌 주교의 생활을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주교님의 거처로는 너무나 작았습니다. 제 영혼이 이토록 검소한 생활 안에서 부드러운 침묵으로 투쟁하시는 거룩한 주교님들에 대한 기쁜 흠모의 마음으로 가득 찼습니다.” “베르뇌 주교는 당신이 홀로 계실 때에는 밥과 소금에 절인 야채 몇 가지뿐이었다
.”

박해시대의 선교사들은 그들 자신이 원했다면 좀 더 좋은 의복이나 더 나은 식생활은 가능했을 법하다. 그러나 그들은 의식주 모든 것을 최소한도의 범위로 낮추었고, 가난한 조선 교우들과 같은 수준에서 먹고 자고 입었다. 이들의 일상생활에서 복음정신의 실천을 위해 청빈을 실천한 그 아름다운 모습을 우리는 기억할 수 있다
.


개항기의 선교사들

 
개항기에 이르러 신앙의 자유는 먼저묵인을 받다가 점차 공인되는 단계로 나아갔다. 이때에 입국한 프랑스 선교사들도 박해시대의 순교자들 못지않게 비장한 환희에 차서 조선 땅을 밟았다. 그 예로 우리는 라푸르카드 신부를 들 수 있다. 그는 1887 1월에 입국한 후 바로 전라도에 부임했다. 그는 전라도 고산(高山)에 도착하여 자신의 소감을 이렇게 말하였다. “자격이 없는 제가 그토록 많은 순교자들의 피로 얼룩진 이 땅, 조선이라는 포도밭을 경작하라고 부름을 받은 것에 대해서 기쁨에 차있습니다.”

프랑스의 파리외방전교회 출신 선교사들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프랑스의 농촌 출신이었다. 농촌 분위기에 익숙한 그들은 자본주의나 경제적 풍요로움에 대한 인식이 충분치 못했다. 그리고 그들은 이미 오래 전에 교회에서 단죄되었으나, 프랑스의 일부 농촌지방에서는 문화의 일부로 자리 잡은 엄격주의적(Jansenisme) 신앙형태의 영향을 받아 세상에서 행하는 고신극기(
苦身克己)를 큰 미덕으로 인식하였다
.

이러한 요소들이 결합되어 조선에 건너온 프랑스 선교사들은 엄격하게 가난을 실천했고, 가난을 이겨내는 모범을 신자들에게 보여주고자 했다. 선교의 기쁨과 사명감에 불탔던 선교사들은 자신의 생활에 대한 절제를 통해 선교지에 성당을 세워나갔다. 근검절약을 통한 성당의 건축 사례를 우리는 전주의 전동성당을 세운 보두네(Baudounet, François Xavier,
尹沙勿, 1859-1915) 신부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몇 해 전에 간행된전주교구사에서는 보두네 윤사물 신부의 생애를 이렇게 전해준다
.

윤사물 신부의 절약은 생활 자체였다. 손님에게는 융숭히 대접하면서도 자기의 먹을거리는 가난한 한국인의 생활수준도 못되었다. 음식만이 아니라 옷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새 수단이나 새 모자 쓰는 것을 꺼려했다. 유일하게 즐겨 입는 옷으로 솜을 넣은 외투가 있었는데, 육장 그것 하나만을 입고 지내어 낡아빠지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오죽했으면 그 가죽은 후 수의로 사용할 옷을 찾았지만 쓸 만한 옷이 없을 정도였을까
.

집도 마찬가지였다. 사제관은 겨울에는 얼어 죽지 않을 정도고 여름에는 쩌 죽지 않을 정도여서 웬만한 사람들은 견디기가 힘들었다. 교우들이보다 못해 성당을 짓기 전에 먼저 사제관부터 짓자고 청할 양이면, ‘먼저 주인부터 모시고 하인이 있을 곳은 천천히 생각합시다.’ 하며 극구 사양하였다. 성당을 신축하면서 그의 내핍생활은 처절할 정도였다. 공소 방문에 절대 필요한 말 한 필마저도 팔았다. 말 판 돈은 공사비에 보태 쓰고 말에게 먹이는 식량도 줄이자는 것이다. 전주성당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돌 하나, 벽돌 한 장이 모두 윤 신부의 내핍생활과 금욕의 표상이라고 하였다
.”

개항기와 식민지시대에 걸쳐 조선에서 활동했던 선교사들 상당수는 자신이 선교하던 가난한 농민들과 생활수준을 맞추어 나갔다. 그들 대부분은 청빈을 실천했고, 복음을 전파하는 선교사는 당연히 그래야 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


남은 말

 
개항기 프랑스 선교사들이 가졌던 물질적 재화에 대한 인식은 개신교 선교사들의 그것과는 상당한 차이를 드러낸다. 개항기 조선에는 미국을 비롯한 영어권의 개신교 선교사들이 다수 들어와서 선교하기 시작했다.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자신들의 나라에서 자산가 계층의 일원이었다. 개신교 선교사들은 프랑스 선교사들보다도 근대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이해가 풍부했다. 당연하게도 그들이 가진 경제에 대한 생각은 프랑스 선교사들과 상당한 차이를 드러낸다.

개신교 선교사들은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삶도 하느님의 축복임을 강조하고자 했다. 그들은 빈한했던 조선사회에 정착하면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통한 축복의 결과로 조선인 그리스도인의 경우에도 부유해질 수 있음을 말했다. 그리고 사람들의 눈에 가장 잘 띄는 언덕배기에 당시 가난한 조선 사람들의 눈에는 호화롭기 그지없던 양옥집을 지었다. 그들은 신앙을 통한 축복이 무엇인지를 개신교 신자들에게 보여주고자 했다. 그리고 그들은 직접선교와 함께 교육이나 의료사업을 통한 간접선교에 일찍이 뛰어들었다
.

여기에서 가톨릭 선교사와 개신교 선교사들이 가졌던 선교정책의 차이를 찾아볼 수 있다. 프랑스 선교사들은 현실생활의 가난을 통해마음이 가난한 이가 되고자 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신자들의 영혼을 구제하려 했다
.

반면에 개신교 선교사들은 현세의 생활을 개선하는 문제에 대한 관심도 적지 않았다. 그 결과 개항기에는 개신교의 선교정책이 좀 더 타당성을 가질 수가 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청빈을 실천했던 교황파견 조선 선교사들의 삶을 잊어서는 아니된다
.

조광 이냐시오 -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로한국 천주교회사 1, 2”, “조선 후기 천주교회사 연구”, “신유박해 자료집등의 저술활동을 통하여 한국교회사 연구에 힘쓰고 있다
.

[
경향잡지, 2009 2월호]


  1. 주문보 신부사건을 통해본 한중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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