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란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하나였다
때는 오후 3시. 가을 하늘은 잔뜩 심술이 난 듯 우중충했고, 금세라도 빗방울이 뚝뚝 떨어질 듯한 날씨였다. 천호성지에서 성지 순례를 마친 우리 일행은 관광버스에 몸을 실었다. 버스는 지리산 자락 아래로 조용히 미끄러지듯 출발했고, 그로부터 시작된 건 말 그대로 ‘광란의 시간’이었다.
고속도로에 접어들자 곧,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오는 권주가가 분위기의 서곡을 알렸다. 잔이 돌고, 웃음이 피어났다. 누군가 수줍게 일어섰고, 또 누군가는 그를 따라 율동을 시작했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예정된 제1부 파티의 막이 올랐다.
그 시작은 서툴고 어색했지만, 곧 봉사자들의 능숙한 바람잡이가 빛을 발했다. 성별도, 나이도, 직업도 무의미한 그 시간 속에서 모두는 ‘막춤’의 주인공이 되었다. 버스 통로는 어느새 댄스 플로어로 변했고, 각자의 춤사위가 뒤엉켜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누구 하나 눈치를 보거나, 망설이는 이 없었다.
이쯤 되면 잠깐의 휴식이 필요했다. 그러나 음악은 멈추지 않았고, 권주가는 다시 한 번 잔을 부추겼다. 잔이 돌며 쌓여 있던 마음의 찌꺼기들이 술과 웃음 속에 서서히 씻겨 내려갔다.
이윽고, 막춤의 절정에 이르던 그 순간. 우리는 어느새 ‘하나’가 되어 있었다. 함께 웃고, 함께 박수치며, 서로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는 사이, 공동체라는 이름의 울타리는 더욱 단단해지고 있었다.
2부 – 노래는 계속되고
막춤이 채 끝나기도 전에, 차 안에는 다시 정적이 흘렀다. 이 침묵은 곧 2부, ‘노래 경연 대회’의 서막을 알리는 예고였다. 오래된 차량의 스피커는 조금은 거칠게 음악을 토해냈지만, 그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중요한 건 함께 ‘부른다’는 것이었다.
한 곡, 두 곡.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마이크를 잡고 무대에 오른 이들은 모두가 진지했다. 누군가는 눈을 감고, 누군가는 하늘을 향해 팔을 휘저으며 노래했다. 그 순간, 버스는 더 이상 단순한 이동 수단이 아니었다. 그곳은 콘서트장이었고, 무대였고, 우리가 무대의 주인공이었다.
몇몇은 어깨춤을 추며 함께 떼창을 했고, 누군가는 수화로, 박수로, 또 눈빛으로 노래를 응원했다. 마이크는 쉬이 식을 줄 몰랐다. 버스는 춤추듯 흔들렸고, 마음도 함께 흔들렸다. 주연과 조연은 없었다. 모두가 주연이었다.
3부 – 마지막 무대, 그리고 하나의 공동체
버스가 깊은 골짜기를 빠져나와 평야를 달릴 즈음, 들판은 황금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가을걷이가 한창인 들녘 위로 지리산 자락이 곱디고운 자태를 뽐냈고, 차창 밖으로는 경호강이 고운 물살로 우리를 응원하듯 따라 흐르고 있었다.
그 풍경에 취해 잠시 정신을 놓고 있을 무렵, 3부 창작 무대가 시작됐다.‘음주가무’에 이어 등장한 건 각자의 ‘끼’가 터지는 즉석 무대였다. 손짓, 발짓, 말장난, 유행어, 그리고 해묵은 유머까지 총출동했다. 이 순간을 위해 준비한 이는 없었다. 그러나 모두가 자연스럽게 ‘하나의 공연자’가 되어 있었다.
어떤 이는 수줍게 노래 한 소절을 흥얼이고, 어떤 이는 엉뚱한 춤사위를 선보였다. 봉사 자매는 무대를 휘젓는 바람잡이로, 어르신들은 자리에서 박수갈채를 보내는 관객으로 존재했다. 이 무대에는 미숙함도, 완벽함도 없었다. 대신 거기엔 예의, 배려, 사랑, 그리고 공동체가 있었다.
누구도 타인을 뒷 담화하거나 불편하게 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지만, 그 눈빛과 미소는 분명 “너무 즐겁다”고 말하고 있었다.
하나 됨의 은총
그들의 직업은 다양했다. 주부, 직장인, 은퇴자, 자영업자, 그리고 다양한 봉사자들. 겉보기엔 평범한 얼굴이지만, 그 속엔 수많은 사연과 무게가 담겨 있을 것이다. 스트레스, 외로움, 경쟁, 불안… 그것을 이 자리에서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여흥의 시간 속에서 누구보다 자유롭고, 밝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잠시, 그 모든 삶의 짐을 내려놓았다. 춤과 노래, 웃음과 술잔 속에서 각자의 ‘노폐물’을 배출했고, 그리하여 다시 걸어갈 힘을 얻었다.
누가 이 무대를 지휘했는가.
누가 이 파티의 주인공이었는가.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 모든 시간과 공간의 연출자는 바로 주님이셨음을.
성스러운 성지 순례를 마친 날, 버스 안에서 펼쳐진 광란의 시간은 결국 우리가 ‘하나’라는 진리를 몸으로 확인한 시간이자,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작은 천국이었다.
이 공동체 속에서 우리 모두는 덕산의 주인공임을, 그리고 서로의 삶에 없어서는 안 될 ‘이웃’임을 다시금 새롭게 발견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