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과 바다’후기
느낌과 감정은 자신의 연륜에 떠라 확연히 다름을 새삼스레 체험했다. 출간된 지 70여 년이 지난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처음 접했던 것은 40대 초반이었다. 그리고 30여 년이 훌쩍 지난 후 다시 정독(精讀)했다. 젊은 시절 맛보지 못했던 '노인과 바다' 이야기는 큰 울림과 긴 여운(餘韻)을 남겼다. 군더더기 없이 짧은 분량이지만 작가 고유의 실존 철학이 집약되어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간결하고 힘찬 문체로 한 인간의 도전과 불굴의 의지, 좌절과 나약함, 세대를 뛰어넘는 우정을 묘사하는 헤밍웨이 문학의 결정판이라는 큰 울림이 그것이었다. 이야기를 집약한다면, 주인공 '산티아고'는 멕시코 만류(灣流)에서 조각배를 타고 홀로 고기잡이하는 가난하고 늙은 어부였다. 그는 벌써 84일째 고기를 잡지 못했다. 그를 따르던 소년 '마늘린'도 부모의 만류로 다른 배를 타게 되었다. 산티아고는 혼자 먼 바다로 나가고, 크고 힘센 청새치 한 마리를 잡으려 거의 이틀을 배 위에서 고투했다. 마침내 청새치를 작살로 찔러 잡아 뱃전에 매어 돌아가던 중 이번에는 상어 떼의 공격을 받는다. 노인은 그놈들과 혈투를 벌인 끝에 항구까지 끌고 오는 데 성공하지만, 거대한 청새치는 뼈만 앙상하게 남았다는 이야기다.
망망대해에서 청새치와 사투를 벌리던 둘째 날, 산티아고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오직 참고 견디려고 할 뿐이었다.”라고 말한다. 그날 그는 청새치가 수면 위로 뛰어 오르고 난 뒤 ‘허지만 난 녀석에게 인간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또 얼마나 참고 견뎌 낼 수 있는지 보여 줘야겠어.”라고 혼자 말을 한다. 이 말을 달리 바꾸면 그는 인내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을 뿐 생각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는 말이 된다. 이렇듯 무엇인가를 깊이 있게 생각하는 일은 산티아고 에게는 날 설다. “고기가 고기로 태어난 것처럼 넌 어부로 태어났으니까.”라고 말하기도 한다. 햄릿처럼 생각하는 인간보다는 돈키호테처럼 행동하는 인간에 가까운 산티아고는 깊이 있은 사색을 하지 않을뿐더러 책을 읽지도 않고 오직 야구 기사만을 읽는다. 그런 산티아고는 폭력과 죽음을 그렇게 무서워하지 않는다. 그는 혼자서 멀리 거친 바다를 나가 고기잡이를 한다는 것부터 보통사람으로서는 하기 어려운 생각이다. 밤낮으로 꼬박 사흘 동안 그는 청새치와 사투를 벌이는가 하면, 청새치를 뜯어 먹으려고 공격해 오는 상어 떼를 물리친다. 그야말로 죽음을 무릅쓰지 않고서는 좀처럼 할 수 없는 일이다. 헤밍웨이는‘노인과 바다’에서 노령(老齡)에 저항하는 모습을 예술적으로 승화(昇華)시켰다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산티아고는 온갖 시련을 겪지만 좌절하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운명에 맞서 도전하는 인간의 용기와 의지를 보여준다. 처음에는 청새치와 그리고 나중에는 상어 떼와 사투를 벌인다. 헤밍웨이 작품의 주인공 가운데 그만큼 온갖 시련과 역경을 위엄 있게 극복하는 인물도 없는 것 같다. 그는 장년이 아니라 인생의 황혼기를 맞이한 노인이기에 그의 이러한 노력은 더욱 값지다는 생각에 나는 산티아고에게 찬사를 보내고 불굴의 투지에 감탄했다. 산티아고의 정신적 승리는 물질적 승리 못지않게 아니, 어쩌면 그보다도 더 소중할 것이다. 산티아고는 자신의 어선보다도 더 큰 청새치를 잡지만 결국에는 상어 떼에게 모두 빼앗기고 만다. 그가 청새치를 지키기 위해 사투를 벌리며 죽인 상어만도 무려 다섯 마리나 된다. 항구로 무사히 돌아왔을 때 청새치는 상어 떼에게 뜯어 먹힌 나머지 형체는 알아볼 수 없고 오직 뼈만이 앙상하게 남아 있다. 산티아고는 상어 떼와 사투를 벌이는 동안 한번은 이 모든 일이 차라리 꿈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한다.
소설의 백미는 다음 구절이다. "하지만 인간은 패배하도록 창조된 게 아니야. 인간은 파멸당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패배할 수는 없어." 하고 그는 생각한다. 언뜻 보아 ‘패배’와 ‘파멸’ 사이에 별 차치가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패배는 어떤 대상과 겨루어서 지는 것을 뜻하고, 파멸은 파괴되어 없어지는 것을 뜻한다. 그러니까 파멸은 패배의 결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산티아고는 물질적으로는 패배할지 몰라도 정신적으로는 조금도 위축되거나 좌절하지 않는다. 어떤 역경과 고난에도 좀처럼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외부의 힘에 의해서 파멸할망정 정신적으로는 좀처럼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산티아고야 말로 주인공의 본래의 뜻대로 영웅이다. 영웅적 주인공한테서 볼 수 있는 백절불굴의 정신이야말로 헤밍웨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덕목이고 가치일 것이다. 항구로 돌아온 산티아고는 소년 마놀린에게 ‘그놈한테 내가 졌어. 마놀린, 놈들한테 내가 완전히 지고 만 거야.”라고 말하는 것은 결과만 놓고 보면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마놀린은 산티아고에게 “할아버지가 고기에게 지신 게 아니에요. 고기한테 지신 게 아니라고요.”마놀린이 두 번이나 되풀이해서 말하듯이 산티아고는 비록 육체적으로 파멸 당했을지는 몰라도 청새치를 잡으려는 시도에서는 조금도 패배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말은 들은 산티아고는 “그렇지. 정말 그래. 내가 진 건 그 뒤였어.”라고 대꾸한다. 그 뒤란 상어 떼의 습격을 받고 난 뒤의 일을 말한다. 곧 상어 떼의 습격을 받고 비록 파멸했을망정 자신이 세운 목표, 큰 고기를 낚았다는 점에서 그는 정신적으로 전혀 패배하지 않고 오히려 승리를 거둔 셈이다. 산티아고는 결과보다는 과정, 목표보다는 수단과 방법에 무게를 싣는 인물이다. 영웅이란 특별한 힘과 능력을 가진 사람일 수 있다. 영웅이란 시대를 변화시킨 사람일 수 있다. 그러나 진정한 영웅은 자신의 희생과 헌신으로 이웃에게 사랑을 준 사람이 아닐까!
드넓은 바다에서 홀로 고기를 잡는 산티아고는 자칫 개인주의를 상징하는 인물로 생각되지만 실제로 그는 아내와 사별한 뒤 판잣집에서 혼자서 외롭게 살고 있으며, 바다에서 고기를 잡을 때도 다른 어부들과 좀처럼 어울리지 않고 홀로 고기잡이를 한다. 그는 한때 초라한 오두막집 벽에 아내의 사진을 걸어 두었지만 사진을 바라볼 때마다 너무 울적한 기분이 들어 그것을 떼어 방구석 선반 위 셔츠 밑에 넣어 두었다. 어쩌다 노인이 소년 마놀린과 함께 마을 술집 ‘테라스’에 앉아 있으면 어부들이 그를 놀려 대기도 한다. 요즈음 용어로 표현한다면 산티아고는 집단 따돌림을 받는 독거노인이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소년 마놀린은 노인에게 음식과 옷을 비롯해 비누 같은 생필품을 가져다줄 뿐만 아니라 낚시 도구를 날라주고 미끼를 잡아 주기도 한다. 더구나 그는 산티아고를 물질적으로 도와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와 정신적 반려자 노릇을 하기도 한다. 마놀린에게 산티아고는 멘토(Mentor)요 상징적 아버지인가 하면, 롤 모델이요 정신적 지주와 다름없다. 산티아고는 청새치와 싸우면서 여러 번 소년을 그리워한다. 단순히 그리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옆에서 고기잡이를 도와주고 쥐가 난 팔을 주물러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산티아고는 자신이 잡은 청새치에 대해서 미안하게 생각한다. 젊은 세대에 속한 어부들과는 달리 그는 자신이 낚는 고기를 단순히 물리쳐야 할 적대자나 경쟁자로 보지 않았다. 비록 죽이기는 했지만 청새치에게 적잖이 연민을 느낀다. 자신은 다랑어라도 잡아 허기를 채웠지만 꼬박 사흘 동안이나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채 자신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 청새치가 왠지 불쌍하다는 생각을 한다. 심지어 청새치를 성자(聖子)에 빗대기도 한다. “눈은 잠망경의 반사경처럼, 행렬에 끼어 걸어가는 성자의 눈처럼 초연했다.”라고 묘사한다. 청새치를 뱃전에 동여매고 항구로 돌아오는 장면에서는 누가 어부 이고 누가 고기인지 좀처럼 구별할 수 없다. 산티아고는 “우리는 지금 마치 형제처럼 항해 하고 있지 않은가.”라고 생각하면서도 도대체 누가 누구를 항구로 끌고 오는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산티아고와 소년 마놀린, 두 사람의 관계는 산티아고가 마침내 항구에 도착해 나누는 대화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사람들이 나를 찾았니?”“물론이죠. 해안 경비대랑 비행기까지 동원했어요.”산티아고는 자기 자신과 바다가 아닌, 이렇게 말상대가 될 누군가가 있다는 게 얼마나 반가운지 새삼 느낀다. “네가 보고 싶었단다. 그런데 넌 뭘 잡았니?” 망망대해에서 혼자 독백만 하던 산티아고는 마놀린을 다시 만나 대화를 나누는 것이 무척이나 반갑다고 고백한 것이다. 마놀린이 이제는 산티아고와 함께 고기잡이를 하겠다고 말하자 안 된다고 말하면서도 부정하는 강도는 낚시질을 떠나기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훨씬 줄어들었다. 똑같은 상황인데도 며칠 전에는 “그건 안 돼, 네가 타는 배는 운이 좋은 배야, 그러니 그 사람들하고 그냥 있어라.”하고 단호하게 거절했지만.
멕시코 만류의 망망대해에서 홀로 사흘 동안 사투 끝에 청새치와 잡아 뱃전에 매고 항구에 도착한 뒤(자신의 돛단배보다 더 큰 청새치는 비록 아가리와 앙상한 뼈만 남았지만) 산티아고가 돛대를 어깨에 걸머메고 넘어지면서 언덕 꼭대기에 있는 판잣집에 오르는 이미지는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걸머메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모습과 겹쳐진다. 또한 ‘노인과 바다’를 끝내는 마지막 장면에서 화자(話者)는 “길 위쪽의 판잣집에서 노인은 다시금 잠이 들어 있었다. 얼굴을 파묻고 엎드려 여전히 잠을 자고 있었고, 소년이 곁에 앉아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라고 말한다. “두 팔을 쭉 뻗고 손바닥을 위로 펼친 채 신문지에 얼굴을 파묻고.”산티아고가 두 팔을 벌리고 누워 잠을 자고 있는 그의 모습은 지금까지 여러 비평가들이 지적해 왔듯이 골고다 언덕 위 십자가에 못 박혀 고통 받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헤밍웨이는 이러한 그리스도교적 상징이나 이미지를 빌려 산티아고의 고통과 희생과 겸손을 보여 준다. 또한 성실을 이득으로, 패배를 승리로, 심지어 죽음을 부활로 바꾸는 영웅적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노인과 바다는 “그는 멕시코 만류에서 조각배를 타고 홀로 고기잡이하는 노인이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해서 마지막으로 “노인은 사자 꿈을 꾸고 있었다.”라고 말로 끝을 맺는다.
백조는 일생 동안 울지 않다가 죽기 직전에 단 한 번 아름다운 소리를 내며 울고 죽는다는 전설이 있다. 그래서 흔히 예술가들의 마지막 작품을 ‘백조의 노래’라고 일컫는다. ‘노인과 바다’는 헤밍웨이가 생존해 있을 시절 마지막으로 출간한 ‘백조의 노래’이다. 헤밍웨이는 두 번째 아내와 별거하고 재혼한 1940년부터 아예 쿠바로 이주해 20여 년 가까이 살았으며 노인과 바다는 바로 쿠바에 살면서 이 근처 멕시코 만(灣)을 배경으로 쓴 작품이다. 한편 헤밍웨이에게 노벨 문학상을 수여한 스웨덴 한림원은 선정 이류를, ‘폭력과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현실 세계에서 선한 싸움을 벌이는 모든 개인에 대한 자연스러운 존경심을 다룬 작품’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선한 싸움’이란 물질적 또는 육체적으로는 파멸당해도 정신적으로는 패배하지 않는 작품의 주인공 산티아고의 모습을 가리키는 말로 받아들여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