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6 - 덕산성당 25년 발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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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1945년 12월 25일 미 군정청 강당에서 드레그 신부가 집전한 미사에 한국인 신
자 150명, 미군 500여 명이 참여하여 한미 합동으로 자정미사를 봉헌하였는데 이 감격
으로 시내에 성당 건립을 결의하게 되었다.
이때 신자들은 드레그 신부와 협의하여 새로운 성당 자리를 물색하고 있었는데 안
국사라는 일본인 절을 인수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지금의 중앙성당 자리에 있던 안국
사는 전형적인 일본절로서 해방되기 얼마 전에 지어진 새 건물이었다. 신자들은 드레
그 신부를 통해 미 군정청에 인수 신청을 하였다. 마침 당시 경찰청장이 문산 출신의
박명제였는데 그는 천주교 신자였다. 이 두 사람과 함께 당시 해군 중위로 있던 최병해
의 노력이 합쳐져서 안국사를 무사히 인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신자들은 온 마
음을 다해 절 건물을 성당으로 변경하는 작업을 하였다. 당시 절 뒤에는 유골함이 가득
들어차 있었고 지금의 성모당 앞에는 작은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정식으로 초대주임 김경우(아릭스) 신부 취임 기념(1946년 4월 10일) 마산 완월동본당 주임신부 목신부(프랑스 신부)
성당 측에서 인수하였는데 이전부터 안
국사 절 내에서 한글 강습소를 운영하 치는 원래 언덕 논이었는데 이를 매입하여 언덕을 깎았고 현재의 성모상 앞에는 커다
던 인민위원회 부인회 소속의 사람들이 란 바위들이 널려 있었는데 이것 역시도 신자들이 그 커다란 바위들을 모두 깨뜨렸다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절을 자기들의 고 한다.
소유로 하려고 문제를 야기 시켰던 것 이렇게 해서 진해 본당의 출발이 이루어지게 되는데 1946년 3월 주재용(바오로) 주교
이다. 이 때문에 청년들이 1개월간 숙 는 당시 신자 수 150명 정도였던 진해공소를 본당으로 승격시키고 진영 본당 신부로
직을 하면서 보호하는 등 수많은 노력 있던 김경우(아릭스) 신부를 초대 본당 신부로 발령을 냈다.
안국사 전경
을 기울여 결국 1946년 3월 25일 우리 당시 진해지역은 대구교구 소속이었는데 해방 당시의 교구장은 일본인 하야사까 구
측의 승소로 매듭지어졌다 . 우여곡절 베에(이레네오) 주교였다. 그러나 해방 후 하야사까 구베에(이레네오) 주교가 사임하는 바
끝에 문제 해결이 잘 되자 이번에는 성 람에 거제 출신의 주재용(바오로) 주교가 1946년 2월 27일 착좌식을 갖고 제4대 대구 교
당 터를 넓히기 위한 노력이 절실히 필 구장을 맡게 되었다.
요했다. 지금의 유치원 건물이 있던 자 진해 본당은 주재용(바오로) 교구장에 의해 신설되었고 초대 본당신부로는 김경우(아
리에는 금융조합 건물이 있었는데 먼저 릭스) 신부가 부임하였다. 당시 김 신부는 진영본당 신부로 있었는데 1946년 전국적으
이것을 인수하였고 인근의 집들도 사들 로 콜레라가 번지던 시기였기 때문에 임명을 받고도 곧바로 부임할 수 없었다. 그래서
였다. 3월에 임명을 받았지만 정식 부임은 4월 10일에 이루어졌다. 진해에 부임한 김 신부는
안국사 시절 성당정문(구호 양곡 배급소) 한편 지금의 수녀원 건물이 있는 위 안국사 내에 살고 있던 난민들을 이주시키면서 본당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나가기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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