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2 - 덕산성당 25년 발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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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정원이 천주교로 개종하여 신자가 됨으로써 신자가 더욱 많이 늘어났다. 그러던 중                                                                  일본인들은 외국인의 진해 출입을 금지하였으므로 프랑스인이었던 목신부는 진해공소

            1932년 엄청난 태풍이 불어 공소 건물의 지붕이 날아가고 벽이 무너지는 시련을 겪게                                                                에 올 수가 없었다. 그래서 판공 때는 신자들이 완월동 본당까지 걸어가서 판공성사를
            되었다. 그러나 신자들은 석동에 사는 배정원의 집을 임시 공소로 사용하면서 어려움                                                                  보았고 여러 사정으로 교세도 약화되어 갔다. 후일 목신부는 대구교구장을 사임하게

            을 극복해 나갔다.                                                                                                     되고 1942년 10월 일본인 하야사까 이레네오 신부가 3대 교구장으로 취임하게 된다.
                                                                                                                             한편, 스스미 부부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고 모두 결혼하여 진해에 살고 있었다. 그러

               ② 경화동 공소                                                                                                    던 중 중일전쟁이 깊어짐에 따라 두 아들은 징용으로 뽑혀 중국으로 떠나게 되었고 며
              한편 신자들은 태풍으로 부서진 충무동 공소를 재건하려 애를 썼지만 관청에서 허가                                                                 느리들만 남게 되었다. 당시는 전쟁 막바지라 물자가 딸렸고 스스미의 사업은 많은 어

            를 해주지 않았다. 당시 충무동 일대에는 일본인들만 살게 하고 조선인들은 경화지역                                                                  려움을 겪었다. 그러던 중 전선으로 떠난 아들의 소식이 끊기게 되자 스스미는 여러 경
            으로 몰아내려고 했던 것이 일본인들의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로를 통해 아들의 행방을 찾았지만 허사였다. 상심한 스스미는 병을 얻게 되어 갑작스

              허가가 나지 않자 어쩔 수 없이 신자들은 경화동의 개인주택 두 채를 매입하여 집을                                                                럽게 죽음을 맞이했다. 열심한 신자였던 부인은 일본 풍습인 화장을 거부하고 일본인
            헐고 공소건물을 다시 지었다. 앞으로 신부님을 모실 것에 대비하여 사제관까지 아담                                                                  전용 화장막 근처에 스스미를 묻었다고 한다. 그러다 얼마 후 부인도 죽었는데 며느리

            하게 지었다고 한다. 공소 대지는 모두 90평으로 신자들이 모금하여 매입한 것이었다.                                                                들이 스스미 무덤 곁에 부인을 장사지냈다고 한다. 모두가 해방되기 전의 일이었다.
              이것이 경화공소의 출발인데 1934년의 일이었다. 그 후 경화공소는 지금의 중앙성당                                                                 해방이 되자 진해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은 여러 차례에 나누어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 세워질 때까지 30여 년 이상을 진해지역의 유일한 공소로 남아있었다. 옛 경화공소                                                                스스미의 며느리들은 혹시라도 남편의 소식이 있을까 끝까지 기다리다 일본으로 떠나
            가 있던 자리는 현재 경화 1가동 735번지와 664번지로 나누어져 개인주택이 들어서 있                                                              는 마지막 차례가 되어 어쩔 수 없이 진해를 떠났다고 한다. 그 뒤로 그들의 행방을 아

            고 공소 흔적은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는 사람은 없다.
              한편 1934년에는 현재 양곡본당 소속으로 있는 창곡공소가 건립되어 축성식을 하게

            되는데 당시 진해, 창원지역에선 제일 큰 공소였다. 건축비의 대부분을 역시 스스미가                                                                   ③ 웅천공소
            부담하였다고 한다.                                                                                                       1956년 설립된 웅천 공소는 중앙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전국적으로 외국인 성직자 67명을 체포하더니,                                                             성당 제4대 주임 장병화(요셉) 신부와
                                                                                                                           김창석(다두)군종 신부가 현재의 웅

                                                                                                                           천 농협 뒤편에 있는 민가를 빌려서
                                                                                                                           공소예절을 하였고 웅천공소 땅이

                                                                                                                           매입되어 소유권이 불명확하던  차
                                                                                                                                                                                웅천 공소
                                                                                                                           1974년 경화본당 제 4대 주임 김해동
                                                                                                                           (요한 금구) 신부가 부임하면서 소유권을 교구 재단으로 정식 이전하였다.
                                                                                                                             70년대 초기만 해도 공소건물이 낡아서 그곳에서는 공소예절을 할 수가 없어서 공소
                          경화공소                 창곡공소 축성식(1934년)Ⅰ현재 양곡성당 소속 창원시 창곡동에 있음.
                                               완월동성당 목신부 옆 일본인 스스미와 부인, 공소회장 김백수.                                          회장 김금석(비오)의 집에서 공소예절을 하기도 하고 김광득(비오)의 집에서 공소예절을





            60  덕산성당 25주년 발자취                                                                                                                                                       제2부. 본당의 역사 및 특징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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