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2 - 덕산성당 25년 발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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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사 40년을 감히 연상해 보며 위안을 삼기도 했었다.
우여 곡절 온갖 시련을 딛고 봉헌한 기차길 옆 조립식 건물의 성당은, 완공 시점부터
하자가 발생하며 수리 보수가 이어졌고, 조립식 건축 자제가 발달하지 못 하던 때이기
도 했지만 예산에 맞추어 시공한 결과는 시련으로만 돌아왔다.
우천 시나 태풍이라도 내습하면 지붕은 날아갈 듯 들뜨며 흔들거렸고, 이곳저곳 누
덕산 공동체의 수로 인한 받침 물그릇은 대기 상태로 항상 준비되어 있어야 했으며, 떨어지려는 창문
25년을 돌아보며 을 잡고 씨름 하시던 신부님의 밤잠은 뜬눈으로 날을 밝혀야 하셨다.
1995년 유난히도 더웠던 그해 여름, 철판 지붕의 사제관은 복사열에 더하여 40도를
제8, 9대 사목 회장 넘나드는 찜통 속에서 땀으로 범벅이 된 옷을 벗어 내시던 신부님을 보면서 재정이 여
김수도 유스티노
의치 아니하여 에어컨 하나 들여놓지 못했던 그때를 생각하면 선종하신 김한주 마르코
신부님께 대한 죄송함에 마음이 아파온다.
주일마다 기차는 기적을 울리며, 때로는 말씀 전례, 때로는 강론시간, 시차만 달리
할뿐 어김없이 지나갔고 시설관리비 또한 날로 늘어만 갔다. 그러함 속에서도 동부지
전능하신 천주성부……. 역 인구유입으로 인한 신자 수는 나날이 늘어나면서, 비좁아진 성전에 들지 못한 신자
신앙고백 시작점에 때맞추어 기적까지 울리며 지나가는 기차소리에 묻혀버린 공동 들은, 모질게도 추웠던 동 계절 주일미사와 대축일 미사를, 모닥불에 손 녹이며 성당
체의 신앙고백은 한동안의 소음 속에서도 계속 이어져 저 멀리 그 소리가 멀어짐을 느 밖에서 봉헌해야 했었다. 이러함으로 인하여 새 성당 신축이 절실히 요구되면서 우리
끼며 끝을 맺는다. 그러함에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의 신앙고백의 소리는 가려가며 들 공동체 모두는 일치하며 새로운 성당을 봉헌하기로 뜻을 모아갔다.
으셨으리라. 성당없는 떠돌이 생활 1년이었고, 어렵게 마련된 성당은 2년도 지나지 않아 많은 문
25여 년 전 철도와 근접해 있었던 본당의 주일미사 환경이 기억 되면서 지나간 나날 제점을 경험한 공동체는 따뜻하고 튼튼한 성당을 건립 하고자 하는 마음만 가득 할뿐
들이 주마등이 되어 다가온다. 모든 것이 모자람뿐인 현실에서 공동체가 할 수 있는 것은 주님께 매달리는 기도밖에
본당은 설립되었으나 “성당건립 결사반대”라는 현수막을 내어 건 주민들의 집단 방 없었다.
해로 인하여 신축하고자 하는 성당(聖堂)은 착공조차 못하고, 신부님은 부임하셨으나 “주님께서 아니 지어주시면 짓는 이들의 수고가 헛되리로다”고 하신 시편의 말씀을
사제관은 전세방이었다. 기억하면서 새 성당 봉헌을 위한 기도를 정성 드려 올렸고,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고,
성당없는 공동체는 법원의 “공사방해 가처분 승소 판결”에 이어 성당이 봉헌되기까 두드리면 열리리라.”는 말씀 따라 공동체 모두는 두 팔 걷고 건축기금 마련에 나섰다.
지 1년여 동안 리어카에 제대를 싣고 평일미사는 사제관으로, 또는 교우 집 거실로, 주 수차례 걸친 본당 바자회와, 각 본당 순회판매, 행사장 위탁판매, 길거리 노점판매,
일미사는 어린이집 강당으로,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봉헌해야 했었다. 기도의자 제작판매, 사과 택배 판매, 신부님 해외출장모금, 하물며 고스톱 경편까지 뜯
초대 김한주(마르코) 신부님 부임 후 약 400여일 만에 고대하던 성당을 마련하게 되면 으며 기금에 보태어졌다.
서 우리공동체 모두는 광야에서 성막을 옮겨가며 약속의 땅을 향하던 이스라엘 백성의 그리고 공동체 모두의 자발적인 건축기금 신립과, 지역 본당 분담금에 힘입어 부지
50 덕산성당 25주년 발자취 제1부. 인사말 및 회고사 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