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77 - 덕산성당 25년 발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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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수기             을 하고 얻어낸 비법을 전수받아 드디어 초등부 주일학교 교사팀이 쌍화차를 만들기

                  시작했다.
 덕산성당표              지금은 성당 지하에 쌍화차를 만드는 방이 있지만 그 당시에는 쌍화차를 만들 만한

 쌍화차              적당한 장소가 없어서 몇몇 교사들 집을 돌아가면서 작업을 했다. 쌍화와 생강, 설탕은
                  농협에서 구매했고, 땅콩은 중앙시장의 땅콩 도매상에서 대추는 밀양까지 가서 직접

                  최상품의 대추를 구매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쌍화차의 반응은 매우 좋았다. 만들기 바
                  쁘게 쌍화차는 불티나게 팔려 나갔고 신자들뿐만 아니라 외인들에게 까지 쌍화차의 맛

 이복희 에스텔          에 대한 입소문이 나서 주문이 들어왔다. 한 팩에 5000원, 우리의 노동의 대가가 모두
                  이익금으로 돌아왔다.

                    쌍화차를 만들면서 교리교사를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때는 수녀
                  님과 보좌신부님이 안 계셨기 때문에 모든 것을 주임 신부님과 함께 했다. 토요일엔 교

                  리교사, 평일에는 대추를 썰어서 말리고 제품을 만드느라 많은 시간을 보냈기에 그야
                  말로 눈 코 뜰 새가 없었다. 게다가 육아에 살림까지…….

 경화성당에서 세례를 받고 우성아파트로 이사를 오면서 덕산동 성당으로 교적을 옮  어느 한 교사는 직장을 다니고 있었는데 직장 일로 여유가 없자 삯을 지불하고서 배
 겼다.              당된 대추를 썰어오기까지 했다. 그렇게 우리는 온 힘을 다해 쌍화차를 만들어 팔았다.

 당시 덕산동성당은 가건물로 지어져 성탄절이나 부활절이 되면 많은 교우들이 성전  지금은 성당 안의 많은 교우들이 도와주
 에 자리가 없어서 밖에 서서 미사를 드리기도 했다. 주일학교 교실도 복잡했고 모든 시  시고 모니카회에서 맡아서 하니 많은 양을

 설과 공간들이 부족했기에 새 성전 건립은 절실했다.  만들어 낼 수 있는데 그 당시에는 6명의 교
 제2대 배진구 베드로신부님이 부임하셔서 본당의 여러 어려움을 살피시고 모든 신  사들이 일주일 내내 만들어도 필요한 양을

 자들의 간절한 소망인 새 성전을 짓는다고 했다. 개개인의 기부와 각 단체들도 성전 건  만들어 내기에는 힘이 들었다. 단돈 천 원이
 립 기금 마련에 동참하라고 했다.   라도 더 모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땅콩을 갈

 나는 그 당시 초등부 주일학교 교사였다. ‘무엇을 어떻게 해서 건축기금을 마련해야   다가 믹서기가 고장이 나도 각 개인이 고쳐
 할까?’ 우리는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서 쓰고 점심밥도 집집마다 돌아가면서 해

 그 때 나는 컴퓨터 학원에 다녔는데 어느 날 어은동에 사는 한 자매님이 손수 만든   먹어가면서 날마다 대추를 열심히 썰어서
 쌍화차를 팔았다. 한 팩을 사서 집에 와서 마셔보니 맛이 아주 좋았다. 그래서 ‘이것을   말리고 했더니 2년 만에(11월부터 3월까지) ‘천

 만들어 팔면 참 좋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만드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부탁했지만 자  만 원’의 기금을 보태게 되었다. 실로 8개월
 신만의 비법을 알려주기를 꺼려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점심을 사 주고 설득에 설  만에 이뤄낸 대단한 결실이었다.

 득을 거듭하여 드디어 그 비법을 알아냈다. 교우들 외에는 판매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  대추를 많이 썰다보니 팔목이 너무 아픈





 174  덕산성당 25주년 발자취                                                     제4부. 공동체의 아름다운 향기  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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