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73 - 덕산성당 25년 발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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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했지만 할머니는 그 성대한 장례식을 뒤로하고 대학병원으로 가셨다. 장례미사가 어서 40분은 족히 걸린 것으로 기억하
끝난 후 성당 마당에 기다리고 있던 앰블런스를 타고 강남의 가톨릭대학 병원으로 가 는데 어린 우리가 사순절 스티커를 채
셨다. 생전 할머니가 시신기증을 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황망히 성당을 떠나 집에도 다 울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우리 할머
시 가보시지 못하고 의과대학의 실험용으로 가셨다. 니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색이 바
할머니는 삼년 만에 우리에게 돌아오셨다. 유골함에 담긴 할머니를 아버지와 막내 동 랜 흰색 털목도리를 두르시고 성당을
생이 서울병원에서 모시고 왔다. 그 날은 인천에 살던 나의 가족과 수원에 있던 막내 네 향해 부지런히 가시던 할머니, 그런
도 모두 내려왔다. 아버지와 우리 오남매가 모두 모여 할머니의 유골함을 땅에 안장하 할머니를 따라 부지런히 그게 뭔지도
였고 그것으로 할머니의 장례절차가 모두 끝났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삼년 만이다. 모르고 졸망졸망 따라가는 우리들. 그
우리가 기억하는 할머니의 일상은 기도를 하시거나 남의 집에 기도하러 가시거나 성 때도 할머니 손에는 묵주가 있었다.
당에 가시거나 하는 게 전부였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우리가 할머니
어릴 적 우리에게 가끔씩 하시던 말씀 중에 당신은 여러 종교를 가봤지만 진정으로 의 나이가 되어간다. 새삼 할머니의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천주교뿐이었다고 하셨다. 그 살기 어렵던 시절 남편 잃 묵주를 들여다 보게 된다. 오단 묵주,
고 자식들 건사하려니 더욱 주님께 매달리게 되었다고 하셨다. 나는 기억하지 못하지 일단 묵주, 삼단 묵주. 가끔 명절이나
첫 레지오 장
만 어린 시절 할머니와 함께 인천에 살았던 언니들은 기억한다. 우리 집에 마귀를 쫓아 기일에 모여 할머니, 엄마, 아버지 이
달라고, 기도해 달라고 사람들이 많이 왔었고 그들을 위해 할머니는 정성껏 기도를 해 야기를 한다. 자신의 삶에 부지런하고
주셨다는 것을. 할머니가 묵주를 손에서 놓지 못하는 이유였을 것이다. 적극적이셨던 아버지, 세상 누구보다
아버지의 직장 때문에 온 가족이 진해로 이사를 왔을 때도 할머니는 당신의 기도생 인자하셨던 엄마, 그리고 언제나 묵주
활을 중단하지 않으셨고 이웃의 굳은 일을 도와주시는 걸 마다하지 않으셨다. 를 들고 있었던 할머니. 그 분들의 유
특히 장례식장도 없었고, 장례지도사도 없던 시절 동네 초상이 나면 장례의식을 도 산 가운데 우리를 가장 기쁘게 하는
맡아 하셨다. 할머니는 교인과 외인의 염하는 방법도 다르다고 하셨다. 그렇게 동네 사 것은 ‘예수님 사랑’을 알게 해 주신 것
람들은 초상이 나면 할머니를 찾았고, 할머니는 돌아가시는 분들에게 대세를 주고, 그 이다. 그리고 할머니와 아버지의 시신
시신 기증
가족들을 성당으로 인도하셨다. 장례의식을 통해 하느님을 찾게 되는 건 그 때나 지금 기증이었다.
이나 마찬가지지만 그 당시 할머니의 봉사 정신은 우리로서는 도저히 따라가지 못할 우리들 오남매뿐 아니라 사위들 중 이미 장기나 시신 기증을 약속한 사람도 있다. 그
일이었다. 리고 나와 남편은 아이들에게 말한다. ‘엄마와 아빠가 혹시 절차를 밟지 못하고 죽더라
우리가 성장할 동안 성당을 놀이터로 만들어 주셨던 할머니, 덕산성당이 없던 시절 도 장기와 시신을 기증하도록 하라’고.
경화동성당을 다녔던 우리는 어느 해 사순절 평일미사에 매일 갔었다. 40개의 꽃스티 그것은 우리 할머니에서부터 아버지로 아버지에게서 우리에게 이어진 마지막 유산
커를 받기 위해서. 그 스티커를 다 붙여서 무슨 선물을 받았는지는 기억이 없다. 그 때 이다. 망설임과 두려움 없이 이 약속을 지킬 용기를 달라고 주님께 기도한다.
의 평일미사는 아마도 새벽 6시거나 저녁 7시였을 것이다. 우리 집에서 성당까지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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