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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빛으로 남은 파리의 추억

어느 해 봄날, 아내와 함께 떠났던 유럽 여행은 내 삶 속에서 하나의 정점처럼 기억된다. 여러 도시 중에서도 유독 파리에서의 며칠은, 사진처럼 선명하고 진한 향기처럼 남아 있다그 기억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조용히, 더 깊게 내 안에 스며든다. 낯선 언어와 처음 밟는 거리 위에서도 마음만은 이상하리만치 평온했다. 파리는 우리를 재촉하지 않았고우리는 그 속도에 기꺼이 몸을 맡겼다. 그 도시는 여행이 아니라 하나의 감정으로 남았다.

 

  세느강은 파리의 심장이었다. 해가 지기 전, ‘바스므쓰’ 선착장에서 유람선을 탔다.  짙은 보라 빛 하늘과 도시의 불빛이 반사된 강물 위로 유람선은 살포시 미끄러졌다. 퐁네프, 퐁마리, 퐁 알렉상드르 3세 다리의 황금빛 장식은 마치 한 편의 시 같았다시테섬 근처에 다다르자 어둠 속에서 노트르담 대성당은 실루엣처럼 솟아올랐다.  루브르의 고요한 벽면과 오르세 미술관의 웅장한 외관, 에펠탑의 빛줄기들이 차례로 지나갔다. 그 밤의 파리는 온통 아름다운 빛의 세계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빛났던 건, 내 곁에서 환하게 웃던 그녀의 얼굴이었다.  도시보다 빛나던 그녀의 표정은 지금도 사진처럼 내 가슴에 남아 있다.

 

  다음 날, 우리는 에펠탑에 올랐다. 도시의 심장 위에서 바라본 파리는 또 다른 얼굴이었다. 높이 올라갈수록 소음은 잦아들고, 도시는 하나의 거대한 풍경으로 수렴되었다. 거리는 방사형으로 뻗어 있었고, 회색 지붕들 사이로 세느강이 유려하게 흐르고 있었다. 금빛 햇살은 도시 전체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수많은 삶의 소리와 발걸음이 저 아래에서 조용히 숨을 고르는 듯했다.난간에 새겨진 서울 8,980km”라는 문구 앞에서 문득, 우리가 얼마나 먼 곳까지 함께 왔는지를 실감했다. 나는 아내의 손을 잡고 파리 전경에 취해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듯 시선을 옮겼다.  낯선 도시에서 손을 잡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세상이 조금은 더 가까워지는 듯했다.

 

  개선문으로 향하는 길. 열두 개의 도로가 만나는 그곳은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샹젤리제 거리의 휘황찬란한 불빛 속에 깨어있는 명품 가게들이 줄지어 서있었다. 커피향이 가득한 인도를 천천히 걸으며, 우리는 마침내 콩코드 광장에 도착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단두대에 올랐던 그 비극의 자리는 이제 햇살과 분수, 수많은 인파로 채워져 있었다. 한때 이곳을 가득 메웠을 절규와 침묵을 떠올리자, 현재의 평온이 오히려 낯설게 다가왔다. 혁명은 수많은 이름을 지웠고, 이 광장은 그 무명의 시간들을 묵묵히 견뎌냈을 것이다. 광장의 돌바닥 아래에는 아직도 그날의 아픈 숨결이 남아 있는 듯했다. 언제나 그러하듯 역사는 무겁지만, 시간은 그 위에 조용히 평화를 덧입힌다.

 

  늦은 오후의 부드러운 햇살을 받으며 우리는 몽마르트 언덕으로 향했다.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엔 오래된 시간의 숨결이 배어 있었고, 광장에는 무명 화가들이 붓질을 이어가고 있었다. 바이올린 소리가 바람을 타고 골목을 감쌌다. 언덕 위 대성당. 하얀 석회암 건물은 마치 파리를 품고 있는 어머니 같았다. 우리는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눈을 감은 채 침묵의 시간을 보냈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빛이 제단 위에 내려앉았다. 그 영롱한 빛은 공간을 물들이며 숨결처럼 퍼져 나갔다. 그 빛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오래된 기도의 응답처럼 느껴졌다. 말없이 올려두었던 마음의 조각들이 그 순간 하나씩 제단 앞에 내려앉는 듯했다.  나는 그 고요한 빛 속에서 평화라는 감정을 새삼 또렷하게 느꼈다. 도시의 모든 소음이 멈추고, 세상과 나 사이의 경계가 부드럽게 풀어지는 듯했다. 나는 그곳에서 바라는 것보다, 이미 받은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깨닫고 조용히 고개 숙이며 감사를 드렸다.

 

  예술의 중심으로 발걸음을 옮긴 건 그다음 날이었다. 루브르 박물관의 유리 피라미드 아래를 지나며 느낀 감정은 마치 거대한 예술의 바다로 뛰어드는 듯한 설렘이었다. 모나리자앞에는 인파가 가득했지만, 그녀는 묵묵히 미소 지으며 세월을 건너고 있었다. 우리는 고대 조각들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시간을 초월한 곡선들, 말없이 말을 건네는 형상들. 예술은 그렇게 언어보다 깊은 방식으로 영원을 품고 있었다. ‘나폴레옹의 대관식앞에서 우리는 걸음을 멈췄다. 프랑스 혁명 이후 황제가 된 그는, 교황의 손이 아닌 스스로 왕관을 들어 자신의 머리 위에 올렸다. 권력의 정점에서 선택한 그 장면은 승리의 기록이면서 동시에 인간 욕망의 초상(肖像)이었다.

 

  그 감정의 여운을 안고, 여행의 마지막 여정은 베르사유 궁전으로 향했다. 황금과 대리석, 화려한 천장화로 가득한 궁전은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주었지만, 베르사유는 왕의 권력이 어디까지 치솟을 수 있는지를 과시하듯 지어진 공간이었다. ‘태양 왕 루이 14의 이름 아래, 수많은 노동과 시간이 이 화려함을 떠받쳤다. 그 찬란함 뒤편에는 말해지지 않은 세월 또한 겹겹이 쌓여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 마음에 가장 깊이 남은 장면은 따로 있었다. 어느 노부부. 남편이 휠체어에 앉은 아내를 조용히 밀고 있었다. 이따금 아내의 귓전에 뭔가를 속삭였다. 그 조용한 장면은 궁전의 찬란함보다 더 빛났고, ‘사랑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조용히 대답해주었다. 정원을 거닐며, 나는 한참을 침묵했다. 웅장한 분수대 앞, 햇살이 잔잔히 반사되는 그 순간. 시간도, 감정도 멈춘 듯했다. 베르사유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화려함이 아니라, 그 고요함 속에 있었다.

 

  이제, 그날의 호사스런 기억을 머금고 화려한 빛의 거리 상젤리제와 몽마르트 언덕을 다시 오를 수 있을련지...  그럼에도 파리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내 안에 여전히 살아 있다.  함께 웃던 순간들, 마주보던 눈빛,  시간이 멈춘 듯 걸었던 거리의 향기는 사진보다 더 선명한 기억으로 조용히 반짝이고 있다. 시간이 흘러 일상이 다시 나를 덮어도,  삶이 조금 버거워질 때도, 나는 문득 그 봄의 파리를 떠올린다. 빛으로 남은 그 도시처럼, 나의 삶에도 사라지지 않는 온기가 있음을 믿게 되기 때문이다. 그날의 파리는 사라지지 않은 빛의 세계로 내 삶 속에 깊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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