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필사, 그 길 위의 순례
길가에 차례 없이 어우러진 풀잎 위에 새벽녘에 몰래 내린 이슬 따라
가을이 왔습니다.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숨이 막히던 더위와 밤인
줄도 모르고 처량하게 울어대는 매미 소리 따라 가을이 묻어 왔습니다.
조금은 쓸쓸하고, 조금은 아릿한 이 계절, 그러나 이왕 묻어온
가을이라면, 촛불을 밝히고 밤새도록 읽을 한 권의 책과 함께,
눈빛만으로 마주해도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어 열무김치에
된장찌개 넣어 비벼 먹어도 웃음이 나는 그런 따뜻한 가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가을의 문턱에서, 저의 긴 여정 하나가
마무리되었습니다.
모두를 힘들게 했던 여름의 끝자락에서
신약과 구약 성경을 완필했습니다.
2020년 11월, 2022년 11월, 그리고 오늘, 2025년 8월의 마지막 날.
세 번째 성경 필사를 마치고, 교구장 주교님의 축복장을 받았습니다.
가슴 깊은 곳에서 남다른 감회가 밀려왔습니다. 성취감과 기쁨보다
먼저, 함께해주신 성령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렸습니다.
많이들 아시겠지만, 성경 필사는 단순히 말씀을 옮겨 적는 외적인
행위가 아닙니다. 한 자, 한 단어를 따라가며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겸손히 그 뜻을 되새기며 신앙의 성장을 경험하는 내적인 여정입니다.
말씀을 필사하는 동안, 하느님께서 주신 사랑과 은총을 더 깊이
깨닫게 되고, 그분과의 관계가 한층 더 친밀해집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뜻을 내 삶 속에 실천하려는 용기를 얻게 됩니다.
또한, 말씀을 반복해서 쓰고 마주하는 동안 믿음은 더욱 깊어지고,
하느님께 대한 신뢰 역시 단단해집니다. 이러한 필사의 시간은
단지 영적 성장의 기회일 뿐 아니라, 삶의 방향과 기준을 바로
세워주는 귀중한 나침반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직접 써 내려간 이 필사본은 나에게 머무는
기록을 넘어서, 가족과 후손에게 신앙의 유산으로 전해질
소중한 선물이 되기를 바랍니다.
성경 필사를 마치고 나니, 마치 먼 길을 걸어온
순례자처럼 마음 깊은 곳에서 잔잔한 평화가 일렁입니다.
필사의 여정은 때론 고요했고, 때론 고단했으며,
말씀 앞에서 내 작은 믿음이 조금씩 자라나는 더없이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이제는 한 구절, 한 구절을 써 내려가던
그 순간들이 모두 감사의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성경 말씀은 내 삶의 등불이 되었고,
어둠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게 인도해 주었습니다.
앞으로도 저는 이 귀한 만남을 마음에 새기며
말씀을 ‘살아내는’ 삶으로 나아가고자 합니다.
언제나 처음 마음처럼 겸손하게, 하느님의 뜻 안에서
살아가는 삶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이 필사본이 제게만 머무르지 않고, 언젠가 가족과
후손들에게도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는 다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가을의 문턱에서, 말씀으로 물든 이 계절이 더욱 깊고 풍성해지기를
바라며, 말씀 필사의 영광을 하느님께 돌립니다.
“주님, 당신의 말씀이 제 발에 등불이요, 저의 길에 빛입니다.”_
-2025,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