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암을 오르내리며
산란(散亂)한 심사(心思)의 너울을 벗지 못한 채
아파트 담장을 지나 풍호 운동장에 접어들었다.
유월의 검붉은 덩굴장미는 수줍은 새색시처럼 살며시 다가와
‘가시에 찔렸다고 그 가시로 나를 다시 찌르면 나는 연두 빛
잎을 피울 수 없답니다.’라고 귓속말을 건넨다.
쪽빛 녹음(綠陰)과 함께 천자암에 이르는 대지는 향기롭고
하늘엔 뭉게구름이 춤사위를 펼치는데 어디선가 이름 모를
산새들의 향연(饗宴)은 고운님 창가에서 애타게 부르는 사랑의
세레나데가 되어 메마른 내 작은 가슴을 헤집고 들어왔다.
천자암 목전에서 가파른 경사를 헉헉대며 오르는 길에
스님의 불경은 목탁 소리와 이중주를 이루며 귓가에 맴도는데
미물(微物)에 불과한 나로서는 그 심오한 말씀을 헤아릴 수 없었다.
천자암 불상을 등지고 고개를 들어 응시(凝視)한 속천만은
아득히 먼 옛 시절 어머니 젖가슴인 듯 포근하고 아늑하게 다가왔다.
바람 한 점 없는 잔잔한 바다엔 긴 여정을 마치고 안식을
누리는 크고 작은 배들의 자태야 말로 한 폭의 그림이었다.
이윽고 광석골 연못 데크로드에 기대어 천자봉에서
휘어진 능선과 연못에 비친 모습을 번갈아 바라보는
그 시각, 뻐꾹새는 슬픔을 토하듯 구슬프게 울어댄다.
청보리가 익어가는 이맘때면 내 고향 동산에서도 오늘처럼
울었던 뻐꾹새 소리는 빛바랜 흑백사진이 되어 뇌리를 스친다.
문득 어머니가 그립고 애달픈 마음에 눈가에 이슬방울이 맺혔다.
나는 '버티기'라는 상황에서 자아(自我)와 함께 고뇌하고 있다.
사람들은 흔히 '버틴다고 하면' 그것이 굴욕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왜 그렇게까지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버틴다는 것'은 그저 말없이 순종만 하는
수동적인 상태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는 게 결코 아니다.
'버틴다는 것'은 내적으로 들끓어 오르는 분노와 모멸감,부당함 등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하고, 외부에서 주어진 기대 행동에 나를 맞추면서도
나 자신을 잃지 않아야 하는 매우 역동적이면서도 힘든 과정이라고 본다.
그래서 버틴다는 것은 기다림이라 할 수 있다.
머지않은 미래를 위해 현재를 참아 내는 것이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하는 시간이다.
버티는 그 시간 동안 그 일의 의미와 절박성을 깨닫고,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필요한 것들을 재정비하며 결국은 성숙한 삶을 익히게 될것이다.
그러므로 버티어 내는 법을 배운다는 것은 어느 누구도
폄하(貶下)할 수 없는 피땀 어린 노력의 결실이라고 본다.
그리고 언젠가 좋은 날은 반드시 올 것이기 때문이다.
천자암을 오르내리는 오늘이라면 일필휘지(一筆揮之)로
삼류소설 한 권쯤은 거뜬히 엮을 수 있을 것 같다.
내 자아와 충돌했던 고뇌와 헝클어진 분노와 치욕이
점철(點綴)된 장막을 걷어치우며 되뇌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거칠게 다가왔던 수난과 아픔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내 영혼의 비타민이 될 은총의 선물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나는 또 독백인양 이렇게 중얼거렸다.
‘유단취장(有短取長)을 기억하며 세상을 떠난 이들의
마지막을 배웅하는 주님의 도구가 되어 굳세게 정진하리라!’고...
애간장을 달래며 한 알 한 알 묵주를 굴리며 발길이
멈춘 곳은 구청 연못에 인접한 놀이 동산이었다.
그곳엔 귀염둥이 토끼 같은 유치원 아이들의 해맑은
미소와 웃음소리가 가시지 않는 평화의 세계였다.
-2024,6,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