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공동체] 공세리성당

by 지역부 posted May 21,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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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세리 성당이 위치하고 있는 아산만과 삽교천은 교회 박해시대에는 내포지방 입구로 해상과 육로가 연결되는 중요한 포구였다. 공세리 성당은 대전교구에서 첫 번째로 설립된 성당이고,
이남에서는 다섯번째 성당으로써 유서깊은 성당이다. 현재 성당이 위치한 9,500여 평의 부지는 예로부터 공세곶창고지(貢稅穀倉庫地)로 유명한 곳이다.
이같이 세곡을 임시 보관하던 자리가 가톨릭 신앙 전교의 전진 기지로 바뀌었다. 1895년 파리외방전교회 드비즈 성 신부가 이곳에 와서 공세 창고를 헐고 복음 창고인 성당을 세운 것이다. 1895년 당시에는 동네 한가운데 있는 가정집을 성당으로 사용했었으나 1897년 창고 건물을 헐고 구 성당 건물(구 사제관)과 구 사제관 건물(현 회합실, 창고)을 짓게 되었다. 초대 본당 신부이던 드비즈 신부는 자신이 직접 성당을 설계하고 지휘 감독하여 1922년 10월 8일 현 성당을 완공하였다. 그는 지역 교육사업과 의료사업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자신이 직접 조제한 한방의술을 활용, 한약을 조제하였으며 이명래 고약으로 유명한 이명래(요한)에게 고약의 비법을 전수시켰다. 처음에는 드비즈 신부의 한국명인 成一論고약으로 불렸었다. 드비즈 신부는 1930년까지 공세리에서 사목하였다. 1988년 9월 20일 성당에서 서남쪽으로 5km 떨어진 해암리 맹고개 3형제 순교자 묘를 성당 구내로 모셨다. 이분들은 공세리 성당 출신의 박의서(사바), 원서(마르코), 익서(세례명 미상)이며 1867년 정묘년에 순교했다. ‘병인치명사적’ 제11권에 “병인풍파를 당하여 3형제가 함께 잡혀 수원으로 올라가며 원서가 말하되 ‘내 평생 천주 공경을 실답게 하지 못하였더니 오늘 주께서 나를 부르셨노라” 하며 즐거워... ’동생 들어 보소. 우리 3형제 올라가 위주 치명하자‘ 하고 조금도 변함없이 3형제 수원으로 올라가니....’ 라고 기록하고 있다. 세 분의 묘 옆에는 미사를 드릴 수 있는 제대가 준비되어 있고, 성당 건물 주위에는 십자가의 길도 조성되어 있어 찾아오는 순례자들의 묵상과 기도를 도울 수 있다. 1990년 15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예수마음 피정의 집’이 완공되어 성지 순례객들의 피정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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