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공동체] 공세리성지

by 지역부 posted May 21,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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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인박해 때 아산 공세리 지역의 순교자들

                                                               박씨 3형제의 묘

  보석은 비록 일시적으로 땅속에 묻히어 빛을 받지 못한다 해도 캐내면 역시 빛난다.
순교자는 박해로 일시 역사의 암흑 속에 묻힌다 해도 반드시 언젠가는 찬란한 광채로 드러난다. 걸매리에서 살다가 1867년에 순교한 밀양 박씨 집안의 순교자 박의서, 박원서, 박익서, 이 마리아, 박인서, 박제환, 박홍갑, 조 모니카, 박화진, 이씨 부인 등 열 분은 하느님이 땅에 묻으신 보석이었다.
서울에서 출발하여 수원, 발안, 아산만을 지나면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 성당이 나온다. 이 성당 앞뜰에는 치명일기(致命日記) 387 박의서와 388 박원서와 389 박익서, 세 분 순교자의 묘가 있다. 이 분들은 모두 걸매리에서 살다가 병인박해가 일어난 이듬해인 1867년에 체포되어 수원에서 순교한 분들이다. 이 분들의 묘는 본디 인주면 해암리 맹령(속칭 맹고개)에 있었는데, 1988년 9월 20일 공세리 성당 변갑철 신부의 주관하에 성당 앞뜰로 이장해 왔다.
박의서, 박원서, 박익서, 세 분의 순교자는 옛날 걸매리에 살던 밀양 박씨 의암공파의 후손이다. 이 집안에는 이미 치명일기에 기록된 이 세 분의 순교자 말고도 이 마리아, 박인서, 박제환, 박홍갑, 조 모니카, 박화진, 이씨 부인 등 일곱 분의 순교자가 더 있다. 그리고 그 주변 마을에서 살던 순교자들이 12명이나 더 있다.
이들의 순교는 어떤 한 개인의 죽음, 가령 병들어 죽은 죽음과는 다른 것이다. 그들의 죽음은 천주교 박해라는 역사적 사건 속에서의 죽음이다. 따라서 그들의 순교는 한국천주교회사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공세리는 조선시대에 충청도 일대에서 관곡을 수합하여 서울로 운송해 가던 창고집이 있던 곳이다. 마을 이름도 세금을 바치던 공세 창고가 있는 곳이라는 데서 온 것으로 보인다.
공세리는 충청도 일대의 공세 관곡을 수합하여 서울로 운송하던 나루였기 때문에 일찍이 마을이 형성되고 또 번창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걸매리는 물이 얕아져 공세나루가 폐쇄되고 아산만에서 삽교천에 이르는 방조제 공사가 이루어지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공세리 앞 방조제 공사는 걸매리에서 살다가 순교한 박씨 3형제의 증조부이신 박만선이 통진 부사에서 물러나온 뒤 시작하여 준공하지 못하고 1782년에 돌아가시자, 그의 아들 박종학이 1784년부터 뒤를 이어 계속하여 준공하고 유민 수 백집을 모아 개간한 논을 나누어주고 살게 함으로써 모원리, 신성리, 신밀두리, 서강리, 신원리, 걸매리의 여섯 마을이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박종학은 걸매리로 이사 오기 전에 면천에서 살고 있었다. 이 면천은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인 김진후가 살던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면천과 이존창이 살던 예산 여사울은 거리가 약 8킬로미터이지만 넓은 평야를 사이에 두었을 뿐 옛날 같으면 하루 아침에 오갈 수 있는 거리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이존창(신유박해 때 내포지방의 사도)과 서로 지면이 있었을 것이며 이러한 지면으로 인하여 전교가 이루어져 일찍부터 천주교를 신앙하였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1. 박씨 3형제의 순교
O 박의서 (사바스)
- 치명일기 387번
후덕한 인품과 굳은 신앙심으로 죽음이 두려워 신앙심이 흔들리거나 배교하려는 마음없이 깨끗하게 주님을 증거하고 목숨을 바쳐 순교하였다. 박의서3형제가 수원 걸매리에 살았으며, 그 후손들이 전라북도 익산군 함열면 용왕동에서 살고있는 밀양박씨 집안임을 알수 있다. 이 후손들은 박해를 피해 일부는 전라북도 익산군 함열면 용왕동으로, 일부는 충남 강경으로, 또 일부는 평택으로 흩어져 살고 있다. 이 후손들 중에서 박상래, 박성팔, 박노헌, 박중신 신부 등 네 분의 사제가 배출되었다.

O 박원서 (마르코)
- 한국교회사 연구소에서 정리 중인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제3부]에 의하면 그는 본디 태중 교우로되 마음이 우람하기로 수계를 잘못하고, 노름도 약간하고, 서털구털 지내므로 그 형님이 항상 걱정하며 살다가 병인년에 3형제가 함께 수원으로 잡혀갈 때 말하기를, “내 평생에 천주를 공경함을 실답게 못하였더니, 오늘 주께서 나를 부르셨다.” 하고 즐거워하며, 장차(將差)더러 “나를 이번에 올려 가거든 갑작스럽게 하지 말고 바로 죽여주면 우리 주모께로 가서 살겠다.“하며, 오히려 그 형님과 아우를 권면하고, 기쁜 마음으로 순교하였다.

O 박익서 (세례명 미상)
- 박상래 신부의 증조부
(비문) 천성이 곱고 순결하여 오로지 한 마음으로 천주를 공경하여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이들 삼형제와 이 마리아가 함께 수원으로 잡혀가 1867년 3월 8일 순교하였다. 시체는 그 당질 웅진씨 바오로와 양성우씨가 거두어 아산시 인주면 맹고개 선영에 안장하였다가 1988년 9월 20일에 맹고개 묘지에서 공세리 본당으로 이장하였다.

2. 밀양 박씨 집안의 순교자들 (7명)
- 이 마리아 (박원서의 부인)
- 박인서 (박의서의 사촌동생)
- 박제환 기천 베드로
- 박홍갑 (박의서의 아들)
- 조 모니카 (박덕여의 부인)
- 박화진 알렉산데르 (박덕여의 아들)
- 이씨부인 (박의서의 종제수)

3. 박씨 외의 걸매리 지방 순교자들
- 김중백
- 김지득
- 이학습
- 김장복 (박덕여의 생질)
- 김씨 (김장복의 아내)
- 오인악
- 장원심과 그의 아들 장팔보
- 김흥서 토마 - 지금의 수원교구 남양성당에 성지화
- 김 필립보(비리버)와 그의 아내 박 마리아 - 남양에서 순교
- 최 사도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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