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공성사 이야기

by 홍보분과 posted Dec 07,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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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해 위험 무릅쓰며 애타게 기다렸던 선물, 판공

 

 
 

 

 

 

 

 

 

 

 

 

 

 

 

 

 

 

 

- 신앙선조들은 모진 박해 속에서 사제를 만나고 소통할 수 있는 판공성사를 애타게 기다렸다.

성사 후 미사를 참례한 신자들은 성체를 영하면서 감동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사진은 원산본당 미사 장면.(1938년)  (사진출처 한국교회사연구소 설립 40주년 기념 화보집)


이매임과 허계임 성녀는 판공 때가 되면 경기도 과천에서 상경해 성사를 받았고, 이광헌 성인은 자기 집에 교우들의 모임을 준비해 성사를 받게 했다. 주문모 신부는 교우촌 회장들에게 주일과 판공 첨례날 교우들을 모아 천주교 요리, 복음서, 성인전을 읽도록 정해주고 판공을 준비하도록 했다.

모진 박해와 사제의 부족으로 신앙선조들이 성사를 받을 수 있는 날은 1년 중 한 번뿐이었다. 판공성사는 신자들에게 간절하고 소중한 시간일 수밖에 없었다. 사제들은 신자들의 간절한 바람을 알기에 고달픈 선교사의 생활 중에도 전국의 교우촌을 찾아다니며 성사를 집전했다.

판공성사는 한국교회에서만 사용하는 특수한 용어다. 한자로는 ‘힘써 노력하여 공을 세운다’는 의미(辦功)와 ‘공로를 헤아려 판단한다’는 의미(判功)로 사용됐다. 가톨릭대사전에서는 전자를 신자의 입장에서 1년 동안 힘써 세운 공로를 사제로부터 판단 받는다는 뜻으로 해석했고, 후자는 사제의 입장에서 신자의 공로를 헤아려 판단한다는 뜻으로 사용된 듯하다고 추정했다. 어떤 의미로 쓰였든지 선교사 없이 시작된 한국교회만큼 애타게 판공성사를 기다려왔던 교회도 없을 것이다. 세례성사는 사제를 대신해 평신도들이 집행할 수 있었지만 성체성사, 병자성사 그리고 고해(판공)성사는 사제 없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제가 조선 땅에 입국한 후에도 판공성사를 쉽게 받을 수 없었다. 전국 각지에 흩어져 숨어 살고 있는 신자들을 찾아가기 위해서 사제들은 10개월이 넘는 시간 동안 낯설고 험한 길을 따라 사목여행을 해야 했다. 게다가 모든 방문은 비밀리에 진행되어야 했다. 혹시라도 외교인이나 주민들에게 의심이라도 사는 날에는 사제는 물론 신자들에게도 어떤 위험이 닥칠지 모를 일이었다. 선교사들은 상복을 입고 미행이 붙지 않게 은밀하게 움직였다. 대신 각 교우촌마다 회장을 임명하고 그들이 신자들을 교육할 수 있도록 교회 조직을 만들어 나갔다. 또한 신자들은 회장을 통해 판공성사 날짜를 확인 받고, 정해진 날짜에만 공소를 찾아올 수 있었다.

어렵사리 이뤄진 판공성사는 신자들에게는 큰 선물이었다. 부모처럼 공경하는 사제를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였고, 사제가 직접 신앙을 지도해주는 귀한 시간이었다.

한편, 조광 교수(한국교회사연구소 고문)가 2009년 경향잡지에 기고한 ‘박해시대 공소의 탄생’에서는 판공성사와 관련된 흥미로운 내용을 발견할 수 있다. 공소라는 단어 안에 그곳에서 진행됐던 판공을 포함한 전례와 선교까지도 함축적으로 담아 사용했다고 한다. 그래서 “공소를 본다”는 말은 판공성사를 뜻하기도 했다는 것.
 
현재 교회법에서는 1년에 한 번 고해성사를 받아야 할 의무를 규정하고 있지만, 한국교회는 1년에 2회 고해성사를 받도록 하고 있다. 이런 관례가 생긴 것은 개항기부터다. 개항기 이후에는 신앙의 자유가 허락돼 사제가 늘어남에 따라 판공성사의 횟수도 늘어났다. 부활대축일 전의 성사를 봄 판공, 성탄대축일 전의 성사는 가을 판공이라고 했다.

또한 공소에서는 판공성사를 하는 날이 명절이나 마찬가지였다. 깨끗한 옷을 입고 농사일도 하루 쉬면서 판공성사에 전념했다. 이렇듯 하느님을 모시기 위해 외면과 내면을 다지기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

판공성사를 받기 전에는 본당 신부가 신자들의 신앙생활 상태를 성경과 교리시험 등의 찰고를 통해 확인한 후 성사를 주었다. 김정숙 교수(영남대)에 따르면 대구 선교사 로베르 신부는 교리를 외우지 못한 신자들에게는 성사를 주지 않았고, 찰고를 통과하지 못해 고해실에서 쫓겨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가족단위로 찰고를 하게 될 때, 아이가 교리문답이나 경문을 다 외우지 못하면 사제가 아이 아버지의 종아리를 치기도 했고, 할아버지를 꾸짖기도 했다. 힘겹고 엄격한 찰고를 거쳐 성사를 받고 난 후 미사에 참례한 신자들은 성체를 영하면서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경우도 많았다.

천주교 신자가 지켜야 할 네 가지 법규인 ‘성교사규(聖敎四規)’는 ▲ 주일과 의무 축일을 지키고 미사에 참례할 것 ▲ 지정된 날에 금식재와 금육재를 지킬 것 ▲ 해마다 한 번은 고해성사를 받을 것 ▲ 1년에 한 번 부활시기에 영성체를 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세 번째 법규에 나오는 고해성사가 판공성사다.

신자들의 의무인 판공성사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방법이 달라져 왔다. 박해시대에는 간절히 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일 년에 한 번도 할 수 없었던 판공성사를 현대 신앙인들 중에는 어렵게 생각하고 스스로 거부하는 경우도 늘어나고 있다. 기해박해(1839년) 때 체포되면서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가 마지막 순간 남긴 말은 현대 신앙인들에게 많은 묵상거리를 제공한다.

“순교의 길을 떠나는 순간, 우리가 느끼는 기쁨을 덜하게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행복했던 3년 동안의 성사, 우리를 사랑하는 저 열심한 신입 교우들을 떠나는 일이다.”

[ 가톨릭신문, 2014년 3월 30일, 이지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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