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날 성지순례

by 김종복(요셉) posted May 16,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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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양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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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면에서 바라본 언양성당, 대한민국 근대 문화유산 표지, ‘바오로 해’ 순례성당 표지(성당 입구 우측)>

 

  언양 지방 신자들은 1888년 본당 설립위원회를 결성하여 오랜 노력 끝에 1927년 5월 25일

   ‘에밀 보드뱅’(한국명:정도평/丁道平) 신부를 초대 본당 주임신부로 하여 언양성당이 설립되었다.

 

언양성당은 1936년 10월 25일 드망즈 주교가 그리스도왕을 주보로 축성한 부산교구 내 가장

오래된  성전이며 인근 울산 장대를 비롯하여 본당 내 12곳의 신앙공동체 후손들의 본거지이다.

언양성당 건물은 울산지역의 가장 오래된 서양식 석조건물(대한민국 근대유산  제103호)

보드뱅 신부가 명동성당을 건축한 중국 기술자들을 데려와서 완공하였다.

 

선조들의 신앙 계보를 이어온 언양성당은 전국적 성소의 온상지로 2016년 현재 37명의 성직자와

36명의 수도자, 20여명의 동정녀를 배출시켰으며 대주교 1명, 주교 1명, 수도회 관구장 2명의 출신지이다.

또한 5개의 공소를 둔 본당으로 순교 선열의 본당으로 순교 선열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신앙의 못자리’라고

할 수 있는 곳이며 성당 뒷산에는 성모 동굴과 십자가의 길이 있다.

(자료 출처:언양성당 안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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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사 중, 이곳  교우로부터 언양성지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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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양성당 제대 - 제대 뒤 주보 그리스도 왕, 성모마리아, 성요셉상은 초대 신부(보드뱅)께서

                                   프랑스에서 제작해 운송하여 설치한 것이라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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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양 지방 신자들은 1888년 본당 설립위원회를 결성하여 오랜 노력 끝에 1927년 5월 25일

          ‘에밀 보드뱅’(한국명:정도평/丁道平) 신부를 초대 본당 주임신부로 하여 언양성당이 설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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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양성당 성모동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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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내 중앙에 자리하고 있는 종탑 - 세월을 이겨낸 흔적이 역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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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앙 유물 전시관>

신앙유물 전시관은 언양 성당 성전과 함께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석조 슬라브 건물로

1936년부터 본당 사제관으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이후 언양 천주교 선교 200주년을 기념하여 1990년

신앙유물 전시관으로 개관되었다. 현재 신앙유물 전시관에는 총 696점의 신앙 및 민속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이들 신앙 유물은 교황청에 등록된 아주 귀중한 자료들이다.

(자료:언양성당 안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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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당 뒷산으로 오르는 길 - ‘십자가의 길’ 과 '성모동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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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티 공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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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티공소와 순교성지 안내표지가 살티마을 표지석과 함께 도로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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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티 공소>     

언양 지방에서 간월 공소, 대재 공소에 이어 1868년에 설립된 살티 공소는

가지산 중턱에 위치한 첩첩산중의 신자촌이다. 이곳 살티 공소로부터 약 500m

떨어진 곳에 '살티 순교성지'가 조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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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티공소 성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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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소 입구 좌측-안내문과 우측-천주교당(天主敎堂) 표지석>

살티공소는 낡았지만 모진 풍파의 박해에도 꿋꿋하게 버티고 지켜온 세월 만큼이나

뚜렸한 기념비들이 우릴 향해, 지난 시대의 희비를 말하고 있는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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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티공소 내부>

                           

 

살티 순교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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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티 순교성지 안내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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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해박해(己亥迫害)와 병오박해(丙午迫害) 이후에 김영재(金永濟 1827~1876/ 베드로)는 당시

경상도 지방을 담당한 다블뤼 신부 및 최양업(토마스)신부를 맞이해 부산 지방에서는 처음으로  

공소를 설립하고 1858년에는 공소 건물을 짓기도 하였으나 무진박해(戊辰迫害) 때

경상도를 휩쓴 1868년 7월 체포되었다.

 

부친(김상은/야고보)과 여동생(동정녀 김 아가다)를 비롯한 많은 신자들이 함께

체포된 김영제는 서울로 압송되어 극심한 고문과 문초를 당해 불구의 몸이 되었다.

1869년 봄, 그는 특별히 사면되어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혹독한 고문으로 인한

장독(杖毒)으로 결국 1876년 삶을 마감하게 되었다. 

 

1981년 11월 언양성당 신자들이 김영제의 묘를 말끔하게 단장하고 기념비를 세웠다.

1994년 4월 2일 원래 묘지에서 서북쪽으로 약 18m 지점인 현재의 위치로 유해를 이장한 후

김영제의 5대손인 김윤근(베드로) 신부가 울산성당 신자들의 후원금으로 분묘를 단장하고,

순교비· 십자가· 제대· 예수성심상· 성모상· 성지표지석을 세워 묘역을 단장하였다.

성모상 옆으로는 살티공소 출신 신자들의 묘 10여 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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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성심상에서 바라본 살티 순교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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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교성지를 살펴보는 본당 교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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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교자 김영제 배드로의 묘와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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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정녀 김아가다의 묘와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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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티 순교성지, 예수성심상 앞에서 김덕영 형제와 함께>

 

 

유교와 불교가 공존하는 곳 - 밀양 표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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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충사 - 대광전(大光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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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충사 - 관음전(觀音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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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충사 - 범종루(梵鍾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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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천왕문'에서 내려다본 모습>

 

                             

명례성지 - 순교자 신석복 마르코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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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상남도 문화재 526호로 지정된 ‘명례성당’ 전경(1897년 도내 첫 천주교 본당)>

명례성당은 김대건, 최양업, 신부에 이어 한국인 세 번째 신부이자 우리 땅에서

처음 서품(敍品)된 강성삼 신부의 첫 사목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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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지성지 이제민(에드워드)신부님께서 성지와 성지 조성 사업에 관한 설명을 하고 있다.

그 시간에도 몇몇 할머니 신자는 성모님께 촛불을 봉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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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례성당 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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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례성지 순례와 저녁 식사를 마치고 교우들은 버스로 돌아가고 있지만,

두 분 신부님들(본당 신부님, 명례 신부님)은 낙동강을 등지고 뭔가 담소를 나누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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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례성지 기념성당 신축 현장(신석복 마르코 생가 터 능선)>

지난 3월 4일, 교구장 배기현 주교님을 모시고 ‘명례성지 순교자 기념성당’

신축을 위한 기공식 후 공사가 진행 중이다. 지금 명례성지는 복자 마르코 신석복이

소금 장수였음을 기억하여 ‘녹는 소금 운동’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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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례성지 능선에서 바라본 낙동강>

 

                                                               명지순례 후기

천주교 신자들의 영적 고향으로 통하는 명례성지는

밀양과 김해를 잇는 나루가 있던 낙동강 변 나지막한 언덕 위에 있다.

 10여 년 전, 교구 ‘00 봉사자’ 과정에서 성경 공부를 할 때 일행과 함께 이곳을 순례했다.

그땐, 강변을 바라보며 ‘00 봉사자’ 과정을 위한 성경공부에 매진(邁進)할 결의를 다졌다.

10여 년이 지난 오늘, 본당 교우들과  명례성지를 다시 찾게 되어 감회에 젖는다.

 

오늘 이시간, 굴곡진 세월의 흐름을 아랑곳 하지 않은 채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을

성지 능선에서 꽤 긴 시간을 응시(凝視)하는데, 상상의 나래는 150여 년을 거슬러 오른다.

1866년 병인박해 때, 건너편 강변 에디선가 관원에게 체포되어 대구 감영으로 끌려가

순교한 ‘소금과 누룩 장수’였던 ‘신석복 마르코’의 삶을그려본다. 지난 2014년 8월,

프란치스코 교황은 신석복 마르코를 성인의 전 단계인 복자(福者)로 시복했다.

 

 지금 명례성지는 ‘순교자 기념성당’ 신축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다.

퍽이나 다행스럽고 다른 한편으로 많은 분들에게 감사 드린다. 명례성지에서

추구하는 ‘녹는 소금 운동’에 신자들이 십시일반 참여하여 우리 지역에 또 다른 신앙의

터전이 굳게 자리잡아 ‘녹는 소금이 영성’이 깃드는 교구가 되길 기원한다.

 

우리 신앙과 믿음은, 바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말씀을 ‘지금-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듣고, 믿으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 믿음의 삶을

실천하는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 할 것이다. 나는 과연 그리스도인가(?)

자문(自問)하면서 낙동강 변을 바라보는 시선을 돌리며 성지를 떠난다.

-2017,5,8일 명지성지 순례를 마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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