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비엔나(Republic of Austria,Vienna)

by 김종복(요셉) posted Jan 21,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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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스트리아 비엔나(Republic of Austria,Vien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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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주요 관광지

<공식 명칭 : 오스트리아 공화국, 수도 : 빈(Wien/독어) , 비엔나(Vienna/영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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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쉔부른 궁전’  정문 – 정문 기둥위에 조각된 독수리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상징이다.

 

1918년 ‘합스부르크’ 마지막 황제 ‘카를 1세’ 황제는

1차 대전의 패배로 왕위에서 퇴임하면서 이곳에서 퇴임 연설을 했다.

이후 오스트리아는 공화국이 되었고 궁전도 공화국의 소유가 되었다.

 ‘쉔부룬’ 궁전은 오스트리아 제국의 영욕을 간직한 채, 제2차 세계대전의 피해를 입어

1950년대에 복구되었으며, 빈에서 가장 인기 있는 관광 명소 중 하나로

자리매김 하고 있으며 ‘오스트리아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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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에서 바라본 쉔브른 궁전 -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女帝)가

                 프랑스 ‘베르사 궁’을 보고 경쟁심에 불타 화려하게 증축했다는 '여름 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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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함의 극치 ‘쉔브룬’ 궁전 연회장(사진 - 여행사 제공)

                    <<궁전 내부의 사진 촬영을 엄격히 제한하여 사진을 남기지 못했다.>>

 

오스트리아 수도 ‘빈’의 남서쪽 교외에 있는 ‘합스부르크가’의

여름 별궁으로, 합스부르크 왕조 600년의 역사를 간직한 유서 깊은 곳이다.

‘마리아 테레지아’를 비롯한 많은 왕들이 이곳에서 정무를 보았고,

나폴레옹에게 점령당했을 때는 나폴레옹 군사령부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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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넵튠 분수대 뒤에서 바라본 정원과 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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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뒤 언덕에서 바라본 궁전과 비엔나 시가지(원안은 스테판 대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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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전 정원 끝에 있는 ‘냅튠’(Neptune/바다의 신) 분수대 앞에서!

분수대 뒤 언덕 위의  조형물은 1775년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가 프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기념하고 전몰자의 위령을 위해 세운 일종의 개선문인 ‘글로리에테’(Gloriette)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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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냅튠’(Neptune/바다의 신) 분수대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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쉔브룬’ 궁전과 “마리 앙뜨와네뜨” - 1

‘쉔브룬 궁전’은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의 16명 자녀 중 막내딸인 '마리 앙뜨와네뜨'가

 15세까지 지내던 곳이기도 하다. '마리 앙뜨와네뜨'는 당시 정략 결혼으로 프랑스 루이 16세의

 왕비가 되어 무관심한 남편과 주위의 시기심으로 늘 외로워 하다가 프랑스 혁명으로 38세의

나이에 국고를 낭비한 죄로(형식상 간첩죄)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던 비운의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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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쉔브룬’ 궁전과 ‘마리 앙투아네트’ - 2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삶은 영화, 만화, 소설 등 다양한

장르에서 극적인 이야기 소재로 자주 등장한다. 그녀의 삶은 사치, 낭비, 향락으로 프랑스

혁명을 재촉한 것으로 지목되는가 하면,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폄하되고 마침내 처형 당한 비운의

여인으로 동정 받기도 한다. 15세 신랑과 14세 신부의 결혼, 그것은 정략과 동맹이었다.

신랑은 프랑스 국왕 ‘루이’ 15세의 손자, 이후 ‘루이’ 16세가 될 왕세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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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앙뜨와네뜨‘의 처형 장면

'마리 앙뜨와네뜨' 는 당시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와,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마지막 정략 결혼으로 프랑스 루이 16세의 왕비가

 되었지만, 무관심한 남편과 주위의 시기심으로 외로움 속에서 호사스런 사생활로

프랑스 국민의 극심한 반감을 사게 되었고 마침내 프랑스 혁명으로 1793년 10월 16일 12시 15분,

38세 생일을 약 2주 앞둔 날 그녀의 목은 콩코드 광장에서 잘렸고, 그녀의 남편 ‘루이 16세’도

1793년 1월 21일에 처형됐다. 단두대에 오른 ‘마리 앙트와네트’의 주요 죄목은

 ‘쉔부른’ 궁에 편지를 보내 스파이 활동을 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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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전 관람을 마치고 정문에서 기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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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전 앞 광장에서 쉔브른 궁전 정문을 바라본 모습

 

궁전을 관람하면서 모짜르트와 앙투아네트를 엮어보았다!

모차르트는 1762년 10월 13일 가족 4명과 함께 빈을 방문하여,

교외 쉰브른 이궁(離宮)의 마리 테레제 여황제의 부름을 받아 어전 연주를 했다.

여황제에게는 모차르트보다 1살 위인 왕녀가 있었다. 모차르트가 마루바닥에 넘어졌을 때

함께 놀고 있던 왕녀가 부축해서 일으켜 주었다. 이 때 기뻐한 모차르트는

 '나와 결혼해 달라'고 말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고 한다.

 

그녀는 프랑스의 루이 16세의 왕비가 된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왕녀다.

순탄치 않은 정략 결혼 후, 프랑스 혁명 때, 부군 루이 16세 황제에 이어

콩코드 광장에서 단두대의 이슬로 생을 마감했다.

 

돌이킬 수 없는 가정(假定)이지만 마리 앙투아네트와

천재 음악가 ‘아마데우스 볼프강 모짜르크’가 부부의 인연을 맺었다면

그의 음악세계와 그녀의 삶은 어떠했을까!

 

가상(假想)이 존재치 않은 역사를 응시(凝視)하면서 비운의 천재 음악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짜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와 단두대 위에서

 생을 마감한 오스트리아의 공주 마리 앙투아네트 (Marie Antoinette)를

생각하며 빈의 상징 ‘성 슈테판 대성당’으로 걸음을 재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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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엔나의 상징 ‘성 슈테판’ 대성당(St. Stephan’s Cathedral)

 

음악과 낭만이 흘러넘치는 예술의 도시 수도 빈의 중심에

오스트리아 최대 고딕 양식 건물로 세워진 슈테판 대성당은 여러 세월에 걸쳐

증축되면서 오늘날의 모습을 보여준다. 오래 전부터 있었던 성당 유적지에

1137년부터 새 성당 공사가 시작돼 1160년에 완공되었고 이후

여러 세기에 걸쳐서 복원과 증축을 거듭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화재로 내부가 소실되었지만 국민이 성금을 모아   

    1948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고, 교회의 최초 순교자인 성 슈테판(스테파노)

주보성인으로 한 이 성당은 빈의 랜드마크로 세계의 많은 사람으로부터 사랑받는다.

유럽의 대성당들처럼 외부와 내부에 아름다운 성물이 가득하고 그것을

보면서 사람들의 마음은 정화되고 새로워진다.

 

길이 107m, 폭 70m, 내부 높이 37m, 첨탑(남쪽) 높이가 137m에 달한다.

    25만 개의 청색·금색 벽돌로 만든 화려한 모자이크 지붕이 눈에 띄며 북측

종루 탑은 엘리베이터로, 남측 탑은 계단을 따라 올라갈 수 있다.

  

1782년,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결혼식이 있었고,

1791년, 그의 장례식을 치른 곳이다.  ‘빈’ 시민들은 매년 12월 31일

슈테판 대성당 앞 광장에 모여 새해를 맞이한다.

자료 출처 : 가톨릭 신문(정웅모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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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이 입정할 때 미사 중 이었다. - 사진 뒤 좌,우 두 사람 뒤로는

미사 중 일반 관람객이 안으로 들어갈 수 없도록 칸막이가 설치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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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당 중앙 제대화
최초의 순교자이며 이 성당의 수호자인 "성 스테판(스테파노)'을 모시고 있다.

중앙 성단 성화는 '요한 야콥 폭‘ 작품으로, 주석 판 위에 '스테판' 성인의

순교를 주제로 한 성화를 검은 대리석으로 치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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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을 이루어 준다는 “포아취 마리아 채플” -  입구 오른쪽

 

헝가리 수도 부다페스트의 ‘다뉴브’강 근처까지 오스만 터키 군이 점령해 있을 때

“포아치 마을 성당”에 있는 모자이크 성모 마리아상이 터키 군의 침공을 두려워 하여

눈물을 자주 흘렸다고 한다. “합스부르크” 왕가가 이 소식을 듣고 성모 마리아상

모셔오는 작전을 실행하여 1696년“스테판 대성당”에 옮겨 모셨다.

 

이후 성모 마리아는 눈물을 그쳤다고 한다.

수주일 후 “사보이의 오이게네” 장군이 이끄는 “합스부르크” 군대가

터키 군과의 헝가리 “젠타” 전투에서 대승했다. “합스부르크”군대는 1697년 터키 군의

반격으로 재개된 전쟁에서 5개월 동안 연전연승을 거뒀다.

 

“포아취”마을은 이 후 “마리아 포아취”로 이름을 개명했다고 한다

 이런 전설 때문에 오늘날 까지 “포아취 마리아 채플”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기도하는 장소가 되었다.

우리 가족도 이곳에서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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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입구 왼쪽에 위치한 “십자가 채플(chapel/경당)

 

대성당내 6개  ‘채플’중 “십자가 채플”이  인기가 많다고 한다.

정문으로 들어와 왼쪽에 위치한 채플로 십자가상의 예수님이 중앙에 모셔진

이곳에는 ‘사보이의 오이게네’ 군주의 무덤이 있고, ‘모짜르트’

 장례식이 거행된 곳으로 유명하다.

 

‘모짜르트’는 ‘스테판’ 대성당 앞의 ‘피가로 하우스’

(현재의 모차르트 기념관)로 이사 온 후 대성당의 신자로 등록했다고 한다.

‘콘스탄체 베버’와 결혼식도 대성당에서 올렸고

 두 아들의 영아 세례도 여기서 받았다.

 

모차르트의 장례식은 1791년 12월 6일 “십자가 채플”에서 거행했다고 한다.

그날은 비바람이 몹시 거칠게 몰아치는 추운 겨울이었고 부인 ‘콘스탄체’마저도 마지막을  

지키지 못해 결국 모차르트의 유해는 물론이고 그의 묘지조차 찾을 수가 없다고 한다.

 

세기의 천재 음악가 ‘모차르트’의 마지막 길은 초라하다 못해 참으로 슬프고 외로웠다.

불과 몇 사람이 참석한 가운데 대성당 중앙 제단이 아닌 “십자가 채플”에서

마지막을 고해야 했으니 애석하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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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당에서 가장 돋보이는 성물은 중앙 제단 왼쪽의 작은 경당에 있는 성상 조각 패널이다.

성모 마리아의 주요 일생을 묘사한 이 작품은 후기 고딕 시대인 1447년에 프레데릭 3세의 지시로

제작됐다. 후에 여러 수도원에 설치됐다가 1885년에 슈테판성당의 작은 경당으로 옮겨졌다.

나무 조각에 채색을 한 이 접이식 조각은 매우 친숙하고 다정다감한 모습이다.

 

성상의 중앙 위는 성모 대관식의 모습이며, 아래는 아기 예수와 성모 마리아.

왼쪽의 성녀 '바바라'가 탑을 들고 있고, 오른쪽의 성녀 '카타리나'는 바퀴를 들고

있으며 양 옆의 문에는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의 일생을 조각으로 표현하였다.

-자료 : 가톨릭 신문(정웅모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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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 제단 왼쪽의 작은 경당에 있는 성상 조각 패널을 확대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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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엔나와 오스트리아 공화국의 문장이 장식되어 있는 대성당 북쪽 지붕

벽면이나 종탑에서 뿐 아니라 지붕도 23만 개에 이르는 여러 색의 도자 타일로 장식해 아름다움을

더했다. 지붕 위 두 개의 머리를 가진 독수리 문양은 ‘신성 로마 제국’(합스부르크 제국) 의 상징이며,

군인의 코트 문양은 비엔나와 오스트리아 군대를 상징한다. 갈매기가 하늘 높이 나는 듯한  

                  가하학적인 지붕 문양은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하늘로 향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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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고 웅장한 “성 스테판’ 대성당을 사진으로 담기에는 쉽지 않다.

<모형을 만들어 관광객에게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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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엔나의 중심지, ‘케른트너’ 거리

비엔나 관광의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는 거리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국립 오페라 하우스에서

시작하여 ‘슈테판’ 대성당 광장에 이르는 비엔나의 중심가로 명품관이 즐비하며

보행자 전용 거리인 ‘그라벤’과 ‘콜마르크트’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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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른트너’ 거리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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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스테판’ 대성당 인근 골목과 모차르트 기념품 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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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른트너’ 거리의 카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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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엔나 ‘그라벤’Graben) 거리

그라벤 거리의 명물 중의 하나인 삼위일체 탑

동유럽에서 볼 수 있는 ‘페스트’ 치유에 감사하며 봉헌한 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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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라벤 거리의 명물 삼위일체 기념탑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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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벤’ 거리의 카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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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엔나의 이곳저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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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엔나에서는 비엔나 커피를 마셔야 하는데, 사실 비엔나 커피(Vienna Coffee) 란 없었다.

비엔나 커피의 본래 이름이 ‘아인슈패너 커피(Einspanner Coffee)’이기 때문이다.

‘말 한 마리가 끄는 마차’라는 뜻의 이 커피는 마부들이 추위를 이기기 위해

‘아메리카노’에 크림과 설탕을 듬뿍 넣어 마시던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지금은 블랙커피에 휘핑크림을 올려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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