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령회 봉사자 성지순례

by 김종복(요셉) posted Nov 07,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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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찬문 안토니오 순교 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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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봉성지 순례에 함께한 연령회 봉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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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자 정찬문 안토니오 순교자’ 안내 표지 앞에서 바라본 사봉 공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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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면에서 바라본 사봉 공소>

 

35.png.jpg                              <복자 정찬문 안토니오 묘(1822 ~ 1867)>

정찬문(안토니오) 순교자는 병인박해 때 혹독한 고문과 형벌을 받고

1867년 45세에 참수 치명하였으며, 2014년 8월 16일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하여 시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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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자 정찬문 안토니오 묘(1822 ~ 1867)>

정찬문 안토니오는 순교한 뒤 3일 동안 옥 안에 그대로 버려져 있었고, 

사촌들이 시신을 찾으러 갔지만 양반 가문이고 재심을 청구한 죄수라는 이유로

머리도 없이 몸만 내주었는데 머리가 없는 유해가 묻혀 있다고 해서

무두묘(無頭墓)라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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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중심에 위치한 순교자 정찬문 안토니오 묘지에 도착 후 기도하고

십자가의 길을 바치며 성지를 순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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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삽자가의 길 제 1처 : 예수님께서 사형 선고를 받으심>

순례에 참례한 봉사들은 순교자 묘지 참배 후  잘 조성된 십자가의 길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며 1처에서 14처까지 함께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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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자가의 길 제2, 3, 4처> 

 

정찬문 안토니오 순교자는, 1866년 병인박해 19위 순교자에 해당되는 분이다.

1866년 3월 청주에서 오반지 바오로가, 대구에서 신석복 마르코가 순교하였다.

12월에는 공주에서 김원중 스테파노가,, 청주에서 순교한 장 토마스와 경상도 함안에서

순교한 구한선 태대오는 1866년 어는 달에 순교하였는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1867년 1월에는 진주에서 정찬문 안토니오가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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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자가의 길 제5, 6, 7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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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자가의 길 제8, 9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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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자가의 길 제10처 : 예수님께서 옷 벗김 당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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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의 자연은 봉사자들에게 겸손을 보여 주고 있었다.

 

풍요로운 10월도 시간이 지나면서  11월에 자리를 내어 주었다.

아름다운 색으로 뭇 시선을 사로잡던 영롱한 단풍도 가을이 익어가고

살랑거리는 바람에 땅으로 떨어져 내려 왔다. 함께한 연령회 봉사자들은

낙엽이 쌓인 사봉성지 십자가의 길을 따라 기도하며 이동하였다.

 

길바닥에서 딩구는 낙엽이 봉사자 일행에게 말했다.

여러분의 삶도 우리처럼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라고….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나부끼는 낙엽이 다시 말을 건넸다

‘우리 같은 삶의 시작은 겸손입니다. 겸손의 다른

이름은 존중과 배려 입니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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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자가의 길 제11처 :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원안은 승천하는 성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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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천하는 성모상’ 앞에서! (최재상 마티아 신부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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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자가의 길 제12, 13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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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자가의 길 제14처 : 에수님께서 무덤에 묻히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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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자가 길 14처를 마친 후 일행은 순교자 묘지 앞에서 마침 기도를 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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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역 왼쪽에 순교자에 대한 상세한 역사적 사실에 대하여 ‘치명일기,

병인순교자 증언록’에서 발췌한 내용을 안내하고 있다.>

 

                       복자 정찬문 안토니오 순교자 안내문

진주시 사봉면 무촌리의 중촌 마을에는 머리가 없는 유해가 묻혀 있다 해서

‘무두묘’(無頭墓)라 불리던 순교 복자 정찬문 안토니오의 묘가 있습니다.

1822년 허유 고개 중촌에서 태어난 정찬문은 대산 가등 공소의 천주교 신자

집안의 칠원 윤씨와 혼인하여 아들 중순을 두었습니다. 그는 부인의 권면으로

1863년 입교하여 단란한 성가정을 이루며 전교 활동에 충실한 생활을 했습니다.

병인박해가 일어난 1866년 가을 진주 포졸에게 체포된 정찬문은 감옥에서 25일

동안 온갖 혹독한 고문과 형벌을 받으면서도 결코 배교하지 않았습니다. 아기를

등에 업고 밥을 빌어 옥으로 나르던 부인 윤씨의 격려에 힘입은 그는 모진 매를

견뎌내고 끝내 감옥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3일 동안 옥에 버려져 있던 그의

시신을 사촌들이 몸체만 수습해 고향 인근에 매장하면서 무두묘로 불리기

시작했고, 그 후 순교자의 묘는 오랜 세월 동안 방치된 끝에 잊혀갔습니다.

1946년 문산 성당의 서정도 신부는 굼실 공소 회장에게 무두묘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고, 1948년 3월 무촌리에 살던 광산 김씨 할머니의 제보를 받아 허유 고개

길섶에 있던 순교자의 묘를 찾았습니다. 그 해 5월 31일 순교자의 유해를 확인하고

그 앞에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그 후 1975년 그 인근에 새로 조성된 사봉 공소의

순교자 묘역으로 이장했고, 1978년 묘소를 새로 단장하면서 순교비를 건립했습니다.

순교자의 묘소를 보존해 온 문산 성당은 본당 설립 100주년을 기념해 2005년

새 공소 건물을 신축해 축복식을 가졌습니다. 정찬문 안토니오는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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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지 한쪽에 성모동산이 꾸며져 있고 그곳에서 기도하고 계신 성모님을 남나게 된다.>

 

 

                                                 <<진주 문산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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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설립된 서부경남 최초의 본당, 문산본당>

 

2005년 본당 설립 100주년을 맞은 문산성당, 한옥 양식과 고딕 양식의 두 성당은

동서양 건축양식의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두 가지 양식의 성당이 공존함으로써 우리나라

 성당 건축의 토착화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02년 5월 31일

문화재청으로부터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35호로 지정되었다.

구 성당 앞 잔디밭과 소나무, 벚꽃 등 자연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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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면에서 바라본 문산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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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께한 봉사자들이 기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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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당 좌측 성부자 상, 우측 성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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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산성당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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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정찬문 안토니오 순교성지 순례를 마친 봉사자 일행은

문산성당을 방문, 성체조배를 하며 순례의 의미를 되새겼다.

 

 

<<통영 한산도 제승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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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산도 이 충무공 유적지(경상남도 통영시 한산면 두억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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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 여객선 부두에서 25분 운항하여 한산도 선착장에 도착했다.

            잘 정비된 제승당 진입로를 따라 이동 중 '한산도 제승당'을 영상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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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산도 제승당(사진 : 문화재 청)>

 

한산도 이충무공 유적'(사적, 1963년 지정)  

이순신(李舜臣)의 사령부가 있던 곳이다. 이곳을 본거지로 삼아 당포해전(唐浦海戰)을

승리한 뒤, 왜적과 세 번째로 접전하여 적을 섬멸시키고 해상권을 장악하는 동시에 적의

해상 보급로를 차단하여 적의 사기와 전의(戰意)에 큰 타격을 준 곳이다. 이것이

한산도대첩(閑山島大捷)으로 행주대첩·진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의 하나로 꼽힌다.

 

이순신이 한산도에 진(陣)을 친 이후 늘 이 집에 기거하면서

휘하 참모들과 작전계획을 협의하였던 곳이며 집무실이기도 하다.

이곳은 원래 운주당(運籌堂) 터다. 운주당이란 이순신이 가는 곳마다 기거하던 곳을

편의상 부르는 명칭이었는데, 1740년(영조 16) 통제사 조경(趙儆)이 이 옛터에

유허비(遺墟碑)를 세우고 '제승당'이라 이름하면서 비롯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1930년대에 중수한 것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건물이다.

경내에는 영당인 충무사(忠武祠)를 비롯해 유허비·기념비·귀선각(龜船閣)·한산정(閑山亭)

·대첩문(大捷門) 등이 있으며, 1976년 성역화작업으로 정비되었다.

                                     -자료 : 문화재 관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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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산문閑山門), 한산문에 들어사면 제승당 경내라 할 수 있다.>

 

62.png.jpg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우국충정을 기리는 시비(詩碑)>

우측  :한산도가, 좌측 : 한산도 야음 <모델 : 최규섭 비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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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건문(大建門)을 지키는 보초, 수군과 함께한 봉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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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무문(忠武門), 이곳에 들어서면 정면에 제승당(制勝堂), 우측에 수루(戍樓)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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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승당(制勝堂)>

 

충무공께서는 1593,7,15-1597,2, 한양으로 압송되기 전

38개월 동안 이곳에 운주당을 설치했다. 이순신 장군의 집무실이자 작전지후본부

운주당은 2대 통제사였던 원균이 칠천량 전투에서 패한 후 12척의 함선을 이끌고

살아남은 배설 장군이 왜군에게 군사 기밀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운주당을 불살라

버렸다. 이후 영조 때 통제사로 부임한 조경(趙儆) 폐허가 된 운주당터를 찾아

제승당’(制勝堂)이라는 현판을 써 걸었다.

<자료 : 문화재 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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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승당 내부(중앙 그림:한산대첩도)>

 

우 : 맹산서해(盟山誓海) 좌 : 욕일보천(浴日補天)

<산에 맹세하고 바다에 맹세하여 해를 목욕시키고 하늘 뚫린 곳을 메웠네>

운주당은 주판을 놓듯이 이리저리 궁리하고 작전을 세우는 집이란 뜻이고,

제승당은 적과 싸워 이긴다는 의미를 품고 있다.

 

‘삼도수군통제사’란 관직은 임진왜란 전에는 없었으나

이순신 장군을 위해 새로 만든 관직으로 경상도·전라도·충청도 등

3도의 모든 해군을 지휘하는 지금의 해군참모총장과 같다. 선조 임금이

얼마나 다급했으면 조선 수군의 모든 지휘권을 한 손에

쥐여주면서까지 왜적을 막으라 하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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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산대첩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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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루(戍樓)는 임진왜란 때 이순신이 왜적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해 자주 찾았던 망루다.

아슌신은 수루에 올라 왜적을 물리치고 나라를 구할 수 있기를 염원하며 걱정하는

                 시를 읊기도 했다. 널리 알려진 한산도가(閑山島)歌)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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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루에 서서 충무공 이순신을 만나다!>

 

국보 제76호로 지정된 《난중일기》와 한시 등을 남긴

 이순신 장군의 유명한 시가 한산섬 앞바다를 조망하는 수루 위에 걸려 있다.

 낮에는 왜적의 동태를 살피고 밤에는 번민으로 잠 못 이루었을 충무공을

생각하며 눈을 감고 시를 되뇌이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영웅 이순신의 우국충정과 가족을 향한

그리움이 절절히 느껴지는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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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 한산대첩비

이순신 장군의 한산대첩을 기념하기 위해 1979년 세운 비로 거북선을

본뜬 받침대 위에 세워 졋으며, 비문에는 이순신 장군이 1592년 학인진을

펼쳐 왜선 73척 격침시킨 승전보 내용이 담겨있다.

 

아래 :  거북 등대

1963년 12월 제승당 수로 암초 위에 세운 것으로 한산대첩지가 이곳임을

알리기 위해 세워졌다. 또힌 선박의 이정표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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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순신 후손 삼도수군통제사 공덕비(功德碑)>

 

충무공 이순신의 후손으로 삼도수군통제사(전라, 경상, 충청), 부사의

벼슬을 지낸 이들 중 어진 정치로 칭송을 받은 6명의 비석이다. 한산도와 거제도의

주민들이 이들의 공을 기리기 위하여 세웠던 공덕비를 이곳에 모아 놓았다. 오른쪽부터

이태상, 이한창, 이태권, 이승권, 이규석, 이규안***의 공덕비가 늘어서 있다.

 

이태상(李泰祥, 5대손, 121대 통제사), 이한창(李漢昌, 6대손, 138대 통제사),

이태권(李泰權, 8대손, 부사), 이승권(李升權, 8대손, 172대 통제사),

이규석(李奎奭, 10대손, 198대 통제사),

이규안(李奎顔, 10대손, 203대 통제사)

 

대부분의 비석에 ‘撫恤島民 千秋不忘(무휼도민 천추불망)’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섬사람들을 따뜻하게 돌보아 준 공덕을 영원히 잊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자료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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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의 영정을 모시고 있는 충무사(忠武祠) 입구(좌측 : 유허비(遺墟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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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서 가는 봉사자 자매를 불러 영상으로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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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은 충무사에 모신 충무공 영정 앞에서 분향하고 충무공의 우국충정에

감사드리며 묵념을 했다. 그리고 방명록에 기록했다.

 

충무사(忠武)祠)는

충무공 이순신의 영정을 모신 사당(祠堂)이다.

영정은 종이품(從二品) 통제상의 관복 차림으로 그려져 있다.

매년 봄,가을에는 통영시민들이 제승당에서 제사를 올리고, 한산대첩

기념일인 8워 14일에는 해군의 주관으로 한산대첩제를 성대히

거행하여 충무공의 호국 정신을 기리며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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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산도 충무사의 충무공 이순신 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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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png.jpg                         <제승당 순례를 마치고 돌아가는 선상에서 바라본 수루>

 

 가을이 익어가는 한산도 제승당의 수루(戍樓)를 바라보며 시름에 잠겼다. 

한산도가(閑山島歌), 한산도 야음(閑山島 夜吟)읊으며 우국충정(憂國衷情)의

결의를 다졌던 충무공! 그 이면에 가족을 향한 그리움이 절절히 느껴지는 

안타까운 마음에 가슴이 먹먹하고 콧등이 시큰하였다!!

 

<<한산도 가(閑山島歌)>>

閑山島 月明夜 上戍樓  撫大刀(한산도 월명야 상수루 무대도)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深愁時 何處  一聲羌笛 更添愁(심수시 하처 일성강적 갱첨수)

깊은 시름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 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한산도 야음(閑山島 夜吟)>>  

水國秋光暮  驚寒鴈陣高(수국추광모  경한안진고)

한 바다에 가을빛 저물어가니 찬비람에 놀란 기러기 떼 높이 나는구나

愚心輾轉夜  殘月照弓刀(우심전전야  잔월조궁도)

근심 가득 잠 못 들어 뒤척이는 밤 새벽 달 창에 들어 활과 칼을 비추네.

-충무공 이순신-

 

<<-난중일기, 1595,10,20일- >> 맑음

늦게 가리포, 금갑, 남도, 사도,  여도가 보러 왔기에 술을 먹여 보냈다.

저물어 영동(조계종)도 와서 저녁밥을 먹고 돌아갔다.

이날 밤 바람은 몹시 싸늘하고 차가운 달빛이 낮과 같아 

잠을 들지 못하고 밤새도록 뒤척거렸다.

온갖 근심이 가슴을 치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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