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얼빈’에서 만난 대한제국의 ‘영웅’

by 김종복(요셉) posted Feb 20, 2023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하얼빈’에서 만난 대한제국의 ‘영웅’
모두가 최선을 다하고 숨 가쁘게 달려온 2022년,

세밑에 김훈 선생의 소설 ‘하얼빈’을 손에 들었다.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칼의 노래” 가 명장으로서 이룩한

업적에 가려졌던 이순신의 요동(搖動)하는 내면을 묘사했다면, “하얼빈”은

안중근에게 드리워져 있던 영웅의 그늘을 걷어내고 그의 가장 뜨겁고

혼란스러웠을 시간을 현재에 되살리며 난세를 헤쳐가야 하는 운명과 마주한,

안중근 도마(토마스)의 거사와 순국의 기획과 과정을 소상히 묘사한

흥미진진한 역사 소설이었다.

 

구한말, 쇠약해져가는 조국을 바라보기만 할 수 없었던 청년들의

결기(決起)가 들끓고, 세상의 흐름에 맨몸으로 부딪친 민중들이 공허하게

스러지던 어두운 비극적인 상황 속에서 안중근이 좇는 대의와

그가 느끼는 인간적인 두려움은 더욱 대비를 이룬다.

동양의 평화를 위해 자신의 희생을 불사하면서도, 집안의 장남이자

한 가정의 가장이며 천주교에서 세례 받은 신앙인이라는 정체성 때문에

살인이라는 중죄에 임하는 한 인간의 대의와 윤리가 충돌한다.

안중근이 천주교인으로서 지닌 신앙심과 속세의 인간으로서 지닌

증오심이 부딪치며 수시로 머뭇거리는 그의 모습은 그간

상대적으로 주목되지 않았던 낯선 면모를 보았다.

나는 안중근의 궤적(軌跡)을 따르는 동안

눈시울을 수차례나 적시며 완독했다. 

 

참담한 슬픔과 굴욕의 시기, 청년 애국자 안중근의 마음은 늘 찹찹했다.

처참히 짓밟히는 조선의 안타까운 현실 앞에 안중근은

기약 없는 떠남을 결심한다.

황해도 진남포에서 신천으로, 서울로, 부산으로, 부산에서 배를 타고

함경북도 연추로, 블라디보스톡으로, 그리고 마침내 하얼빈으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어린 자식들, 늘 미안했던 부인 김아려,

어머니 조 마리아를 뒤로하고 어딘지 모를 머나먼 이국땅으로

떠나가는 청년 안중근! 그 분위기는 참으로 처연(悽然)했다.

아들이 품고 있는 큰 뜻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어머니

조 마리아는 아들을 붙잡지 않았다.

그저 한 마디만 하였다.

 

“거기는 춥다던데, 너는 한뎃잠을 좋아하니 견딜 만 하겠구나.

네 처가 가엾게 되었구나. 내가 잘 살필 터이니 그리 알아라.”

안중근은 이른 새벽에 길을 나섰다.

짐은 겨울 옷 한 벌에 책 몇 권과 천주교

기도서를 보따리에 넣은 것이 전부였다.

아내 김아려는 대문에서 남편과 작별했다.

이승에서 더 이상 남편과 해후(邂逅)할 수 없음을

직감한 아내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눈물을 흘렸다.

오직 대한독립이라는 사명 하나를 가슴에 간직하고 조국과

사랑하는 가족을 뒤로 하고 머나먼 길을 떠나는 안중근의 뒷모습은

한없이 나약하고 지조 없이 오늘을 살아가는 내 가슴을 치게 만들었다.

 

조선 통감으로 한일합방 수행을 마친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을

유람한다는 소식을 들은 안중근은 그의 동지 우덕순과 함께

하얼빈에서 이토의 암살 계획을 세운다.

우덕순은 ‘채가구’ 역에서, 안중근은 ‘하얼빈’ 역에서

잠복하여 기회가 되는 자가 암살을 성공시키기로 약속한다.

마침내 하얼빈에 도착한 안중근은 우덕순과 거사를

목전에 두고 하얼빈 시내로 나갔다.

두 사람이 주고받은 대화를 통해 그들 마음이

얼마나 결연하고 엄숙했던 지를 잘 알 수 있었다.

 

“옷을 사러 가자. 옷이라니. 지금 입은 옷은 추레하다.

돈이 모자랄 텐데. 넌 돈 걱정을 하지 마라. 왜 갑자기 옷이냐?

쏘러 갈 때 입자. 머리를 깎자. 잡힐 때 깔끔한 게 좋겠다. 그렇겠구나.”

안 의사는 하얼빈 의거 직전, 부인 김아려와

세 자녀를 하얼빈으로 데려와 달라고 동지에게 부탁했다.

김 여사는 큰 딸을 명동성당 수녀원에 맡기고, 두 아들을 데리고 나섰으나

의거 바로 다음날 하얼빈에 도착하는 바람에 안 의사와 상봉하지 못했다.

 

1909년 10월 26일 아침, 안중근은 중국과 러시아 접경 지역인

하얼빈 역에서 러시아 군대의 환영을 받던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다.

이 의거는 조선 통감으로 재직하면서 한일합방을 추진했던

가장 중요한 인물을 응징한 대사건이다.

러시아 경찰대 숙직실에 구금된 생태로 있던 안중근은 저격 30분 후

이토 히로부미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서 기뻐 어쩔 줄을 몰라 하다가,

벽에 걸려있는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게 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사건 다음날 이완용은 이토 히로부미 가족을 위로하기 위해 뤼순으로 달려갔다. 뤼순에서 돌아온 그는 이토 히로부미 가족에게 위로금 10만원(현 시세 30억 원)을 하사하라고 조선 정부를 압박했고, 순종은 마지못해 재가하였다.

더없이 나약한 순종 임금은 자칭 천왕 메이지에게 위로의 전문을 보냈다.

“오늘 이토 공작이 하얼빈에서 흉악한 역도에게 화를 당하였다는

보고를 받고 통분(痛憤)한 마음을 금할 길 없습니다. 삼가 위로를 보냅니다.”

 

청년 안중근, 그는 서른한 살에 대한의군 참모중장이었고

‘동양평화론’이라는 사상을 남겼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총을 쥔 자가 살아있는 인간이므로 총구는 늘 흔들린다.”

안중근이 이토를 저격하는 순간 총구가 흔들린 건 단순히 거총을

할 수 없는 권총이라서가 아니라, 총을 쏘는 순간 고향으로 돌아가고픈

꿈도 끝이고, 어머니 가슴에 못을 밖은 불효자가 되고, 아내와

자식들에겐 몹쓸 짓을 하는 아버지가 되기 때문이다.

그 수많은 고뇌들이 찰나(刹那)의 순간에 일어나지 않았을까.

지금 모두가 힘들지만 나라조차 없던 시대를 살아야 했던 한 청년의

이야기를 우리 젊은이들이 꼭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취조 때, 그리고 재판 과정 내내 안중근은 더없이

의연하고 당당한 모습을 끝까지 유지하였다.

“그대가 믿는 천주교에서도 사람을 죽이는 것은 죄악이 아닌가?

그렇다. 그러나 남의 나라를 탈취하고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자를 수수방관하는 것은 더 큰 죄악이다.

나는 그 죄악을 제거했다.”

사형 집행 며칠 전 안중근 의사는 동생들에게 눈물겨운 유언을 남겼다.

"독립 전에는 내 시신을 옮기지 마라. 대한독립의 소리가 들려오면

천국에서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한편, 안중근에게 세례를 준 빌렘 신부(프랑스 신부. 한국 이름/홍석구)와 당시

한국 천주교회를 통솔하는 뮈텔 주교(프랑스 신부)와 갈등도 엿볼 수 있었다.

일본 형법에 근거한 재판으로 사형 선고를 받은 안중근은 죽음을

앞두고 하느님께 죄를 고백할 수 있기를 염원했다.

그런 안중근에게 빌렘 신부는 고해성사를 베풀려고 하고,

친일 성향인 무텔 주교는 한국에 겨우 자리 잡은 천주교의

뿌리가 흔들리는 것을 막기 위해 빌렘 신부의 뜻에 반대한다.

한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애쓰는 빌렘 신부와

교회의 안위를 위해 역설적으로 세속과 결탁한 뮈텔 주교의

위치는 성(聖)과 속(俗)의 대립이라는 갈등을 더한다.

빌렘 신부는 뮈텔 교구장의 권위에 굴하지 않고 스스로의 신념에 따라

뤼순의 감옥을 찾아가 안중근의 거칠었던 영혼을 평온한

안식으로 인도하는 명장면을 탄생시킨다. 

 

안중근은 몸을 앞으로 굽히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빌렘 신부도 몸을 앞으로 굽히고 들었다.

안중근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 겼다.

사형수의 머리와 사제의 머리가 가까워졌다.

안중근의 목소리는 숨소리처럼 들렸다.

옥리(獄吏)들은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목소리가 끊기고 침묵이 길게 이어졌다.

빌렘 신부는 침묵 속에서 안중근에게 고해성사(告解聖事)를 베풀었다.

 

안중근은 거사 이듬해인 1910년 3월 26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서른한 살, 그 뜨거운 청춘이 가여워서 나는 눈물을 훔쳤다.

아들을 가슴에 묻는 어머니와 식민지 조국에 남겨질 자식들을

뒤로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사내가 참담했다.

나라를 빼앗기고, 모국어를 빼앗기고, 존재의 이유마저 빼앗긴

나머지 혈혈단신 춥고 배고픈 동토(凍土)의 이국땅을 떠돌던

한 그루 청청한 소나무 같던 안중근!

나는 중얼거리듯 ‘내가 안중근 이었다면 할 수 있었을까?

모든 것을 버리고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었을까?’

몇 번이고 되물었지만 내 영혼은 끝내 대답을 하지 못했다. 


뮤지컬 영화 ‘영웅(윤제균 감독)’은 안중근 의사의 인간적인 고뇌를

사실적으로 담은 스토리이자 그의 마지막 1년을 그린 작품이다.

개봉 2주 만에 200만 관객을 돌파했다는 기사를 보고

새해 벽두(劈頭)에 롯데시네마를 찾았다.

시작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매서운 칼바람에 굴하지 않고 설원을 꿋꿋이

걸어가는 한 청년, 안중근의 걸음에서 시작된다.

때는 1909년 2월, 혹독한 눈길을 걸어 무겁고 고단한 발걸음이

마침내 멈추어 선 곳은 러시아 연해주 남단 크라스키노의

눈 덮인 자작나무 숲, 그곳에 11명의 동지가 모였다.

안중근은 동지들과 함께 왼손 넷째 무명지를 잘라내

붉은 피로 태극기 위에 ‘대한독립’이라는 혈서를 써 내려간다.

 

흰 눈에 검붉은 핏빛이 번지고 동지들은 다 같이 ‘대한독립 만세!’를 외친다.

단지(斷指)동맹으로 조국 독립의 결의를 다진 안중근은 조선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3년 내에 처단하지 못하면 자결하기로 피로 맹세한다.

같은 해 10월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기까지, 그리고 이듬해 3월

그가 사형을 언도받는 순간까지 주요 장면들이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진다.

‘하얼빈’에서 만난 대한제국의‘영웅’은 내 작은 가슴을

뜨겁게 달구며 요동(搖動)치게 했다.

눈시울을 붉히고 눈물을 쏟게 하였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조 마리아’였다.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아들이 사형을 기다리며 감옥에 있을 때

어머니는 편지와 함께 수의(壽衣)를 지어 보낸다.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다음 세상에는 선량한 이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거라.”

어머니의 편지가 낭독될 때 객석에서는 부스럭 거리는

작은 소리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이윽고 “내 아들, 나의 사랑하는 도마야! 떠나갈 시간이 왔구나.

멈추지 말고 뒤돌아보지 말고 큰 뜻을 이루렴. 한 번만 단 한 번만이라도

너를 안아봤으면 너를 지금 이 팔로 안고 싶구나.”

어머니 조 마리아가 사형 선고를 받은 아들의 베넷저고리를 끌어안고 부르는

‘나의 사랑하는 내 아들 도마’의 장면에서 울지 않은 관객은 없었을 것이다.

나 또한 눈시울이 뜨거울 때마다 고였던 눈물이 마침내 흘러내렸다.

 

어머니 조마리아는 항소하려는 아들에게,

‘목숨을 구걸하지 말고 죽으라.’고 한 강인한 어머니였지만, 죽음을 목전에 둔

아들을 ‘한 번만이라도 안아봤으면’하고 가슴을 치는 연약한 여인이기도 했다.

아들의 의로운 죽음을 앞두고 마음을 다지는 강인한 모성과, 아들을 먼저

보내야 하는 끊어질 듯한 슬픔과 대비되면서 큰 울림은 가슴을 헤집고 들어왔다. ‘영웅’의 감독 윤제균은 ‘국제시장’이 한국전쟁 이후 격변의 시대를 살아온

아버지들의 이야기였다면 ‘영웅’은 어머니들의 이야기‘라고 했다. 

 

영화의 마지막, 사형 집행관이 묻는다.

‘마지막으로 할 말 있는가?’

한 점 흐트러짐 없는 꼿꼿한 대장부, 비장한 결의에 찬

대한제국의 아들 인중근은 ‘장부가’를 토하듯 부른다.

“장부가 세상에 태어나 큰 뜻을 품었으니,

죽어도 그 뜻 잊지 말자. 하늘에 대고 맹세해 본다,

하늘이시여, 도와주소서. 우리 꿈 이루도록 하늘이시여, 지켜주소서!”

가슴이 미어진다. 아니 외마디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안중근이 멋지다. 위대하다가 아니라 그냥 불쌍했다.

그리고 죄송했다.

 

이름 없이 쓰러져간 모든 독립운동가,

그분들의 희생이 발판이 되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데,

우리는 그들의 유해가 어디 있는 지도 모른다.

대한제국의 영웅!

그 유해도 100년이 지나도록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황해도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유복하게 살아도 되었을 그가 독립운동 자금

댄다고 쌀집 하다 망하고, 백성 계몽시켜야 한다며 학교를 하다가 망했다.

조국의 입장에선 영웅이지만 한 가족의 입장에서는 그는 재앙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순교자의 길을 택했다.

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다 버렸다.

 

그는 비록 이승에서 가난했고, 굶주렸고, 슬퍼 울었지만,

하느님의 자비로 가난도 없고, 굶주림도 없고, 슬픔도 없는

하느님 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고 있으리라고 확신한다.

나는 지금도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담대히 ‘장부가’를 부르며

대한의 안위만을 생각 헸던 우리의 영웅 안중근!

그 장면이 시야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영화를 보던 그날, 차가운 북풍은 옷깃을 여미게 했다.

우리의 영웅 안중근을 잊지 말라고!

하얼빈에서 대의를 이룬 대한제국의 영웅 안중근을 단단히 기억하라고!


추기(追記) :
후에 알게 되었지만, 러시아 연해주 남단 크라스키노에는

안중근 의사가 주도하여 결성한 세칭 단지동맹

(정식명칭 :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을 기리는 비가 서 있다.

2001년 10월 광복회와 고려학술문화재단이 공동으로 세운 것으로,

그동안 두 번 이전한 끝에 현재 자리에 서게 되었다고 것은

문화재청 홈페이지를 통해 알게 되었다.

 


Articles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