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위령의 날의 단상

by 김종복(요셉) posted Nov 14,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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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 위령의 날의 단상(斷想)

미처 피어나지도 못한 꽃 같은 청춘 158명이 이태원의 좁은

골목에서 작별의 인사 한 마디 못하고 참혹하게도 낙화(落花)했다.

사랑하는 자식을 잃고 애통해 하시는 희생자 부모와

가족들을 생각하니 찹찹한 심정을 지울 수 없다.

자비하신 하느님께 희생자들을 따뜻이 안아주시고 슬픔에 울부짖는

희생자 부모님들과 가족들을 친히 위로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였다.

그런데, 무한 책임이라는 국가는 무엇을 했는지?

관련 경찰과 소방당국의 어떻게 대응하였는가?

여야를 막론하고 국가와 국민을 위해 헌신하는 정치인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많은 것을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세월이 빠른 것인지 내 시간이 고장 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깊어 가는 가을과 함께 위령의 날이 성큼 다가왔다.

지난 112, 장복산 기슭에 자리한 천주교

공동묘지에서 진해지역 합동 위령미사가 있었다.

곱게 물든 단풍이 낙엽이 되어 뒹구는 모습을 바라볼 때면 나그네 여정에서

머물렀다 그분께 돌아가는 우리네 삶을 반추(反芻)하듯 그렇게 비추고 있었다.

산야의 수목은 봄이 되면 새순이 생명을 불어넣고 여름엔 태양빛을 온전히 흡수한다.

가을이면 결실의 열매와 푸르른 잎사귀마저 낙엽으로 내려놓고 겨울을 맞는다.

모든 것을 내어준 벌거숭이 수목은 그 빈자리에떨켜라는 이층(離層)

형성하여 땅으로부터 자양분을 얻어 혹독한 겨울을 이겨낸다.

겨우내 메마른 수목은 자연에 순응하여 동토의 북풍한설을

이겨내고 새 봄이 오면 새 생명을 다시 잉태한다.

 

해마다 맞는 위령의 날!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가는 삶이 허무하고 언젠가는

본향(本鄕)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무상함에 마음이 숙연해진다.

걸어온 삶의 길이가 길면 길수록 남은 삶이 짧다는 것을 느끼는 사이 외로움과

두려움에 놓일 때도 있지만, 종말은 인간의 시간이 끝나는 때이고 영혼으로

이어지는 하느님의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

 

 

죽음! 누구나 죽으면 한 줌 흙으로 돌아간다.

호화로운 묘지에 묻힐 수도, 이름 없는 풀 섶에 버려질 수도,

한 줌 재가 되어 바람에 날려가기도 할 것이다.
우리의 평생은 풍상(風霜)과 인고(忍苦)의 여정이라 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사랑하는 사람과의 영원한 결별(訣別)은 슬픔과 고통과

상처와 두려움이 따르기에 표현할 수 없는 아픔을 동반한다.
때로은 대성통곡의 울부짖음과 회한(悔恨)을 가슴에 묻고 피눈물을 토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죽음 앞에서 많은 것을 생각하고 많은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은 죽은 자가 살아있는 자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인 셈이다.
그럼에도 세월이 흘러 먼 훗날이 오면, 가슴 시린 슬픔은 또 다른
에틋한 그리움이 되어 눈가에 촉촉한 이슬을 맺히게 할 것이다.

 

'인간의 삶이 허무' 라고 부르짖던 코렐렛의 한 대목에 시선이 멈춰진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포효(咆哮)하듯 부르짖으며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고 했던 코헬렛은 그의 마지막(12장)
'늙음과 죽음'을 통해 "젊음의 날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불행의 날들이 닥치기 전에"라고 전한다.
곧 하느님을 섬기는 일도 힘이 있을 때, 기회가 있을 때,
자신의 모든 것이 끝나기 전에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노화(老化)와 고통과 슬픔의 순간을 겪고 있는 우리에게
"먼지는 전에 있던 흙으로 되돌아가고, 목숨은 그것을 주신 하느님께 돌아간다."
라고 외치며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를 향해 '이제는 하느님을 생각하는 시간입니다.
하느님과의 만남을 준비해야 하는 시간입니다.'라고 성찰을 촉구하고 있다.

 

그럼에도 뷸구하고 노년의 현실은 자식과 배우자가 있건 없건
대부분이 양로원이나 요양병원에서 생의 마지막을 보낸다.
가족들에게 떠밀려 그곳에 유배되면(?) 살아서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많은 이들이 의미 없는 삶을 연명하며 희망 없는 하루하루를 그곳에서 보내고
있지만 양로원이나 요양병원은 가고 싶다고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가족들과 대화가 단절되기 시작하면 갈 곳은 그곳 밖에 없다.
왜냐고 묻는다면 '산 사람을 살아야 하니까!'

 

기난했지만 꿈을 꾸던 젊은 시절, 그때 아내는 작은 식탁위에 예쁜 꽃병을 놓았었다.
강산이 수차례 바뀐 지금의 식탁 위에는 꽃병의 흔적은 기억도 없이 사라졌고
그 빈자리에는 약병이 줄을 서있다.
'아~~인생! 고작 꽃병과 약병 그 사이인 것인가!' 라고 중얼거리듯
독백(獨白)을 토하며 종심(從心)이 지난 내 삶을 돌아본다.
목숨 걸고 발버등 쳤던 지난 일들은 사실 별것 아니었다.
그토록 중요시 여겼던 명예도, 자리도, 학력도, 돈도 다 지나가는 것들이었다.
인간 존재의 유한성과 가변성(可變性)을 온 몸으로 체험하고 있기에 이제는
땅 위에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이상, 하느님께서 주신 이 세상에 감사드리며
내 삶의 방향도 피안(彼岸)의 언덕을 바라보는 삶이 되어야 겠다.

  

오늘처럼 속천만을 붉게 수놓은 그림 같은 석양의 노을이 땅거미에

밀리는 시간이면 어느 시인이 읊조렸던 '노년의 나이'가 떠오른다.
'눈가에 자리 잡은 주름이, 이마에 깊게 패인 주름이 제법 친숙하게 느껴지는 나이,
그것이 노년의 나이인가? 삶의 깊이와 희로애락에 조금은 의연해 질 수 있고,
잡아야 할 것과 놓아야 할 것을 눈으로 보는 것뿐만 아니라, 가슴으로 볼 줄 아는
나이가 노년의 나이가 아니던가! 먼 들녁에서 불어오는 한 줌의 바람에도 괜스레
눈시울이 붉혀지고 뜨거운 커피를 마시면서도 가슴에는 한기가 느끼는 나이.
그것이 노년의 나이가 아니던가!'
노년의 백발과 주름투성이의 얼굴은 인생의 온갖 신산(辛酸)과
역경을 넘어온 자랑스러운 깃발이 아닌가.
흰머리, 잔주름, 검버섯이 어찌 인생의 허무이겠는가!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달리다가 가끔씩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본다'고 한다.
걸음이 느린 영혼에 대한 배려에서 비롯한 행동으로 자신의 영혼이
말을 타고 달리는 몸을 쫓아오지 못 할까봐 기다려 준다는 것이다.
언뜻 보면 전근대적인 사상이라고 치부(恥部)할 수도 있지만 혼자만 살아보겠다고
아등바등하는 현대인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교훈이 아닐 수 없다.
이제는 흩어지고 깨어진 사랑의 조각들을 엮으며 늙어가는 인생이 아니라
호박처럼 잘 익어가는 아름다운 노년의 삶으로 귀결(歸結)되기를 소망한다.

 

짙어가는 국향(菊香) 속에 세상 모든 존재의 근원이며, 존재의 기반이신
주님께 내 삶을 의탁하며 시편 기도로 '위령의 날의 단상'을 접는다.
"주님, 먼 옛날부터 베풀어 오신 당신의 자비와 당신의 자애를.
제 젊은 시절의 죄악과 저의 잘못을 기억하지 마소서.
주님, 당신의 자애에 따라, 당신의 선하심을 생각하시어 저를 기억하여 주소서."
아멘!
-2022,11,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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