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위령성월을 보내면서!

by 김종복(요셉) posted Nov 13,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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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 위령성월을 보내면서!

찬 서리에 화들짝 놀란 들국화가 수줍은 듯 샛노랗게 피어오르는 11, 꽃보다 곱고 단풍보다 아름답다는 황홀한 석양에 취해메기의 추억(When You And I Were Young Maggie) 흥얼거리는 나를 발견한다. 15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미국 팝송의 손꼽히는 노래로 사랑받고 있는 메기의 추억이 단순히 사랑하는 사람을 기억하는 노래로 여겼는데, 원곡 가사와 숨겨진 뒷이야기를 알게 된 후 사뭇 다른 애틋한 감정으로 다가온다. 내가 기억하는 '메기의 추억' 우리 말 가사는 이렇다. ‘옛날에 금잔디 동산에 메기 같이 앉아서 놀던 곳, 물레방아 소리 들린다메기 내 사랑하는 메기야 ~ ~’젊음은 흘러간 세월 속에 묻혀 가는데 추억 속에 잠자듯 소식 없는 옛 친구들이 가끔씩 그리워지는 계절입니다.

 

만추(晩秋)가 빚은 오색 산야를 찾아 누군가는 화가가 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시인이 되는 이맘때면, 전례력으로 위령성월을 맞아 세상을 떠난 부모나 친지의 영혼, 특히 연옥 영혼들을 위해 기도와 희생을 바친다. 나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죽은 이들의 영혼을 기억하며 그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죄의 용서와 자비를, 죽은 이들을 대신하여 청하는 위령기도를 바치며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에 직면한다. 파스칼의 명상록 팡세에 이런 말이 있다. ‘죽는다는 것은 확실한 진리이면서, 동시에 불확실한 진리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아무도 죽음 앞에서 예외일 수 없고, 또 언젠가 어떤 모습으로 죽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호스피스 병동의 봉사자들에 의하면, 임종 직전에 가장 많이 하는 세 마디는 그때 좀 참을 걸, 그때 좀 베풀 걸, 그때 좀 열심히 살걸.' 이라고 한다.

 

장례미사 때 망자의 관을 이동하는데 사용되는 운구대가 있는데, 그 운구대를 덮는 휘장 아래에 호디에 미히, 크라스 티비(Hodie mihi, Cras tibi)” 라는 라틴어 경구가 새겨져 있다. “오늘은 내 차례, 내일은 네 차례란 뜻이라고 하는데. 오늘은 나에게 죽음이 찾아왔지만, 내일은 너에게 찾아올 수 있다, 그러니 준비하고 이승의 삶에 교만하거나 자만하지 말고 겸손 하라는 의미다. 우리는 죽음에 대해 부정적이고 가까이하고 싶지 않고 애써 외면하고 마치 나에겐 죽음이 오지 않을 것처럼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불러도 대답 없는 것이,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것이, 손을 잡을 수도 없고 바라볼 수도 없는 것이 바로 죽음이 아니겠는가! 죽음 뒤에 부활이 오고 고통 뒤에 영광이 온다고 하지만, 사랑하는 이의 죽음 앞에서는 다 소용없는 공허한 염불에 지나지 않을 때가 많다. 재력과 권력이 죽음을 유예시킬 수 없으며 부동산과 주식 투자의 광풍이 점점 거세지고 대선을 앞두고 치열한 권력 다툼과 경쟁이 일어나고 있지만 죽음 앞에선 모두가 사상누각이요, 풍전등화다! 장생불사(長生不死)를 꿈꾸며 불로초를 찾던 진시황도 결국은 수레를 타고 전국을 순행하던 중 부패한 시신으로 생을 마감하지 않았는가! 형제 여러분,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할 영혼을 기억합시다. 우리도 언젠가는 죽여야 할 인간임을 생각하면서 하느님 앞에 서야할 존재임을 기억하면서,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가장 보잘 것 없는 죽은 영혼을 위해 위령기도를 바칩시다.

 

새끼를 잃은 어미의 마음을 잘 드러낸 중국 고사를 인용합니다. ‘()나라 환온이 촉()을 정벌하려고 군사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가던 중에 양자강의 삼협(三峽)이라는 곳을 지나면서 한 병사가 새끼 원숭이 한 마리를 잡아 왔는데, 그 어미 원숭이가 환온이 탄 배를 쫓아 백여 리()를 슬피 울며 뒤따라오는 것이었다. 배를 강가에 대자 어미 원숭이가 몸을 날려 배 위로 뛰어 올랐지만 오르자마자 죽고 말았다. 병사들이 하도 이상하여 죽은 원숭이의 배를 가르자 창자가 토막토막 끊어져 있었다고 한다.’미물(微物) 같은 짐승의 비유이자만 새끼를 잃은 어미의 슬픔은 창자가 끊어질 만큼 컸던 것이다. 장례식 중 가장 슬픈 장례는 부모 앞에 세상을 떠난 자식의 장례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애타는 심정을 그 누가 헤아릴 수 있으며 애간장이 끊어지는 아픔과 고통과 슬픔으로 점철된 부모의 마음을 어떻게 위로할 수 있겠는가! 나는 슬픔에 오열하는 유족을 위로하기에 너무 미약한 존재로 그분들 앞에서 어떠한 위로의 말도 찾지 못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함은 침묵 속에 유족의 손을 맞잡고 함께 슬퍼할 뿐입니다. 그 어떤 죽음도 호상(好喪)’이란 없으며 다만 극복해 나가야 할 슬픔의 빈자리가 크게 있을 뿐입니다. 주님! 당신께서 하신 말씀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는 당신의 말씀을 기억하게 하소서!

 

어릴 적 처음 길은 호기심과 희망이 있었고, 젊어서의 처음 길은 설렘으로 두려움이 없었기에 생을 계획하고 미래를 준비 한다는 미명하(美名下)에 자신을 돌아보지도 하느님을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런 죄스러움 때문일까, 이제는 내 삶의 맥락을 돌아보며 심오한 진리를 조금이라도 깨닫기 위해 겸손하게 그분께 다가서는 삶이 되어야 한다고 되새기곤 한다. 온실 속의 화초보다 갖은 풍상을 다 겪어내면서 피어나는 야생화가 더 큰 감동을 주듯, 산정 높은 곳에서 독야청청(獨也靑靑) 하는 삶보다 산 아래 십자가의 현장에서 누군가와 함께 슬픔과 기쁨을 공감하며 일구어내는 삶의 이야기가 더 큰 울림을 줄 것이다. 와 연령회 봉사자들은 두려움과 슬픔에 경황이 없는 유족에게 겸손하게 다가설 것이며, 죽은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봉사자의 본질에 성실히 임할 것입니다. 또한 그것을 보람이자 긍지로 여기고 싶습니다. 앞길이 뒷길보다 짧다는 것을 알기에 발자국 뒤에 새겨지는 뒷모습만은 황혼의 노을처럼 아름답기를 소망하며 주어진 여정을 묵묵히 걸어가고 싶습니다.

 

형제 여러분, ‘어떤 죽음이 가치 있는 죽음이고 어떻게 죽어야 삶을 아름답게 완성하는 것일까요?’산고를 겪어야 새 생명이 탄생하고, 어둠이 지나야 새벽이 오는 것처럼, 삶이 아름답지 않으면 죽음도 아름답지 않다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삶은 한 방향으로만 가지 않아 나쁜 일이 있으면 좋은 일도 있고, 슬픈 날이 있으면 기쁜 날도 옵니다. 그래서 인간은 고통 속에서 희망을 품을 수 있고 기쁨 속에서는 겸손함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거칠게 말할수록 거칠어지고 음란하게 말할수록 음란해 지고 사납게 말할수록 사납게 늙어간다는 것입니다. 노인과 어르신의 차이를 호사가(好事家)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노인은 세월이 가니 몸과 마음이 자연히 늙는다고 생각하고 자기 생각과 고집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이지만, 어르신은 자신을 가꾸고 젊어지려고 스스로 노력하며 상대에게 이해와 아량을 베풀 줄 아는 존경 받는 사람이라고. 그런데 세상사 참으로 애꿎어 인자한 어르신 보다 고집이 세고 너그럽지 못한 노인들을 자주 봅니다. 노년의 그런 추함은 어디서 오는가? 사랑과 용서하는 삶에 인색했거나 은혜의 삶을 망각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삶과 죽음은 언제나 연결되어 있으며 자신이 살아온 방식과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합니다. 노년은 마음이 바뀌어야 생각도 바뀌는데 예컨대 눈의 색깔은 바꿀 수 없지만 입의 모양은 온화한 미소로 바꿀 수 있는 것처럼. 노년은 용서하는 시기고 용서의 근간은 사랑입니다. 노년의 연륜은 미움과 절망까지도 따뜻하게 품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과 은혜로 충만한 노년을 보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일컬어 사람답게 사는 사람이라고 칭송합니다. 저는 이렇게 희망합니다. ‘신앙 안에서 슬픔과 고통에 잠긴 누군가와 함께 한다는 것은 완성을 향한 노년의 길이라고!’

 

형제 여러분, 시편(25, 6-7)의 기도와 연령에게 바치는 기도를 끝으로 함께하는 시간을 마칩니다. “기억 하소서, 주님, 먼 옛날부터 베풀어 오신 당신의 자비와 자애를. 제 젊은 시절의 죄악과 저의 잘못을 기억하지 마소서. 주님, 당신의 자애에 따라, 당신의 선하심을 생각하시어 저를 기억하여 주소서.” “주님, 연령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연령들과 세상을 떠난 모든 이가 하느님의 자비로 평화의 안식을 얻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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