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5월의 푸념

by 김종복(요셉) posted Jun 12,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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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5월의 푸념

    여느 해 보다 일찍 화사한 자태를 드러냈던 벚꽃의 무리도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무색하지 않게  하려는 듯, 가랑비와 미풍조차 견뎌내지 못하고 설화처럼 흩날리는

   낙화를 건네고 우리 곁을 훌쩍 떠났다. 산야를 붉게 물들였던 진달래며 철쭉은

    어느덧  녹음을 짙게 드리우고 간밤에 내린 비는 메마른 대지를 흠뻑 적셨다

   바야흐로   계절의 여왕오월이 살포시 다가와 싱그러운 향기가 코끝에 스미게 한다.

   내게는 라일락만큼 향기가 진한 꽃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향기하면 떠오르는 꽃이  라일락이다. 

   현인 선생의 번안곡(飜案曲)  ‘베사메무쵸에 나오는

    리라꽃 향기를 나에게 전해다오,  ‘리라 꽃은 라일락을 가리키는 프랑스어다.

   짙푸른 녹음과 함께 옹졸하고 삭막한 내 영혼도 라일락 향기로 충만하게 채워지고,

   자연의 섭리(攝理)를 따라 시나브로 살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의 나래를 펼쳐본다. 

 

   5월은 가정의 달이자 어린이 날, 어버이 날, 스승의 날 등 많은 행사가 있다.

   얄팍한 경제사정으로 5월을 맞은 젊은 부모들의 마음은 결코 편안하지는 못할 것이다.

   한편, 이기적이고 자기만 아는 사람을 보면  저 사람은 부모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자랐구나!’ 라고 생각할 때가 있다.

   사랑은 먼저 받아야 줄 수 있는 것이다.

   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양식(삼시 세끼) 안에는

    너희도 주어라.”는 뜻이 들어 있다.

   그러므로 아이는 부모의 사랑과 뜻을 동시에 먹는 것이다.

   물론 사랑만 먹는다고 다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양식 안에 주는 이의 사랑이 들어 있음을 믿어야한다.

   미국 심리학자(해리 할로우 박사)는 새끼 원숭이 격리 실험을 통하여 사랑이

   담기지 않은 음식은, 새끼 원숭이를 사랑 없는 동물로

   머물게 한다는 것을 밝혀냈다고 한다.

   곧 어미의 품에서 자라지 못한 원숭이는 성장해서도 무리 생활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내어 줄 줄 아는 것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녀도 부모가 주는 양식에서 사랑을 느낄 때, 비로소

   부모에 대한 믿음이 생기고 부모의 뜻을 따를 마음도 생길 것이다.

 

   교회력(敎會曆)으로,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영혼을 정화(淨化)하며 저마다 주어진 삶의 십자가를

   겸허히 받아들이며 자선(慈善)과 선행(善行)이 요구되는 사순절도 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이 순식간에 요동칠 때가 있다.

   관대함은 한 순간에 어디론지 사라지고, 마음은 옹달샘보다

   더 작고 초라해져 있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송곳 하나 꽂지 못할 정도로 옹졸하고 팍팍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미세한 외부 충격 한 번에도 크게 흔들린다.

   어느 때 같으면 허허하고 웃어넘길 말 한마디에 부글부글 속을 끓이기도 한다.

   '이래서는 안 된다!' 고 마음을 잘 다스리자고 되뇌곤 한다.

   ‘죽음 없는 부활과 상처와 고통 없는 영광은 존재하지 않음을 잊지 말자...

  

   때로는, 당신은 마음에 꼭 드는 친구 한명 없으신가? 하고 자신을 향해 묻는다.

   ‘삶의 한 가운데에서 허한 느낌으로 바람 앞에 있을 때, 축 처진 어깨를

   다독이며 포근함으로 감싸 줄 해바라기 같은 친구가 곁에 있으면 좋겠다고...

   시리도록 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그곳에서 그리움 하나 가슴에 담고 눈물

   한 방울 흘리더라도 천금 같은 미소로 날 이해하는 꽃향기 같은

   친구가 늘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때로 티격태격하지만 어쩔 수 없이 다시 만날 수밖에 없는 사람, 부끄러운 속사정도

   솔직히 털어놓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당신에겐 있는가?’ 라고 자문자답(自問自答)한다.

   한 사람의 언행이 내 편협하고 미천한 생각을 바로 잡아줄 때 신뢰가 생겨나고,

   상대의 삶과  행동에 존경과 감탄이 일어날 때 믿음이 생겨날 것이다.

   그래서 믿음은 보고 난 뒤에감탄하고 놀라는 것에서,

    ‘듣고 난 뒤에 느끼고 깨닫는 것' 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했다.

    그것이 신학적(神學的)인 믿음이든 개인적인 믿음이든.

   누가 누구를 믿고 의지하며 사랑한다는 것은,  신뢰와 깨달음에서   

   시작되는 것이지만  상대방의 짐을 다 져주는 일은 아닐 것이다.

   상대방이 잘 살 수 있는 길을 발견하도록 돕는 것이 참 사랑이 아닐까.

 

   수년 전, 이스라엘에 여드레 동안 머무르며 남쪽  브레르 세바에서 

   북쪽  ‘에 이르는 성지(聖地) 순례가 생각났다.

   그때 이스라엘 땅은 농사보다는 목축에 적합하다는 것을 실감했고,

   목자(牧者)들은 양과 염소를 신선한 풀이 자라는 곳으로 이동시켜

   배부르게 하고 목을 축이게 한다는 의미를 가슴에 담았다.

   그런데 양은 귀는 밝지만 눈은 그만큼 좋지 않다고 한다

   그래서 목자는 앞장서 가면서 자신의 목소리로 양을 이끄는 것이라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목자의 목소리를 구별하지 못하는 양들은 길을 잃을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양들은 목자의 목소리를 잘 구별한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목자의 목소리를 듣고

   따라왔을 때 늘 배부르고 안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들은 목자를 따를수록  더욱 목자의 목소리를 믿게 되는 것이다.

   이는 아이가 엄마의 목소리를 금방 알아들을 수 있는 것과 같다.

   아이는 엄마에게서 오는 사랑에 익숙해져 엄마의 목소리만 따르면

   안전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평화가 너희와 함께!”하고 말씀하신 대목이 있다.

   그런데 이 말은 원래 예수님 시대의 인사말이었다고 한다.

   이스라엘처럼 우물(오아시스)을 두고 다툼이 많았던 근동(近東)의 유목 민족에게는

   싸움 없는 평화’(shalom)가 인사 말이었고, 안개가 자욱했던 영국 해안에서는

   ‘좋은 아침’(good morning)이 자연스러운 인사가 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오랜 외세의 침략과 6.25를 전후하여 좌, 우익의 싸움이

   치열했던 탓으로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라는 말이 인사말로 자리 잡게 되었을 것이다.

   어떻든 간에 평화, 좋은 아침, 안녕이라는 각기 다른 나라의 인사말이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뜨거운 화두가 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특히, 근간의 정치적 행태를 보면... 

 

   그럼에도 나는, 정치적인 문제에 함몰(陷沒)되지 않고

   내 삶의 라스트 미션(Last mission)을 정리해 본다.

   첫째 "여유를 즐기자." 인데, 이는 단순한 오락과 여흥을 추구하자는 것이 아니다.

   말씀(성경)과 일상을 일탈(逸脫)한 여행과 독서 등을 통해

   더 넓은 세상을 바라보며 성숙한 인간으로 거듭 나자는 것이다.

   둘째는 "사과(謝過)하자"는 것이다.  자신의 잘못이나 실수를 변명하거나

   감추지 않고 솔직하게 인정하고 겸손하게 다가서자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랑하자." 이다.

   내 삶이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절대자(絶對者)이신 그분만 아신다.

   그럼에도 시간은 언제까지나 내가 소유할  것이라고 착각하면서 살아왔다.

   이미 지난 삶을 아쉬워하고 그리워 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오늘 이 시간, 내가 하는 일에 충실하고 나와 가장 가까운 이웃인 가족과,

    더불어 함께하는 사람들에게 감사하고, 그들을 안아 주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하는 작은 봉사에 겸손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는 그것이 사랑이고,

    그것이 사랑을 실천하는 길이라고 나는 희망하며 그 길을 걷고자 한다.

    천당과 지옥은 저승에서 맞는 것이 아니다.

    내가 서있는 지금 이곳에서 현재 진행되는 내 삶이 천당이 될 수도 있고,

    지옥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자는 것이다.

    “당신이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 당신만 울고 당신 주위의 모든 사람은 미소를 지었습니다.

    훗날 당신이 이 세상을 떠날 때에는 당신 혼자 미소 짓고,

    당신 주위의 모든 사람이 울도록 그런 인생을 사십시오."

    지난 부활대축일 지인으로부터 받은 메시지에 콧등이 시큰하고 가슴이 먹먹하였다.

 

   가끔은 뭔가 잘 생각나지 않고, 때로는 지녀야할 것들을

   챙기지 못할 때면 웃음을 머금고 피식 웃는다.

   유쾌하지 않은 일이지만 나이 들고 늙어가는 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이 눈앞에 닥치면 얼마나 황당할까!

   노쇠(老衰) 한다는 것은 세상과 밖을 향해 있던 나 자신을, 앞만 보고 달려온

   나를 내려놓고, 겸손하게 자신을 돌아보고 인생을 음미(吟味)하며

   삶의 열매를 맺으라는 창조주의 배려가 아니겠는가!

   나이 들고 노쇠함을 인식한다는 것은, 그동안 놓치고 살았던 삶의 의미와

   잊고 살아온 자아(自我)를 되찾는 풍요로운 시간이 될 것이다.

 

   젊은 시절엔, 내가 더 사랑하는지 네가 더 사랑하는지

  저울에 달아보자고 저울추를 올리고 내리며 앙앙거렸다.

  그 철없는 다툼도 세월 따라  내 잘못이 더 큰지 네  잘못이 더 큰지,

   내 짐이 더 무거운지 네 짐이 더 무거운지 달아보자고 변해갔다.

   눈부시게 찬란한 이 계절, 가장 가까운 이웃인 그 사람과 함께한 세월을 손꼽아 본다.

   라일락 향이 그윽한 내년 이맘 땨는 말할 수 있을까(?),

     여보, 지난 40여 년 세월, 내가 더 미안했어!” 라고...

   제인 오스틴은 오만과 편견에서 편견(偏見)은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게 하고오만(傲慢)은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할 수 없게 한다.”고 말했다.

   촌척살인과 같은 진리로 받아들이고 싶다.

 

   우리 나이로 101세인 김형석 연세대학교 명예교수가  김형석의 100세 인생

   기고한  단락을 옮기며 계절의 여왕 오월에 토하는 삶의 푸념을 접는다.

    ‘모든 남자는 나이 들수록 따뜻하게 안아주는 여성을 기리는 것 같다.

    젊었을 때는 연정(戀情)을 즐기고 가정을 가진 후에는 애정(愛情)을 쌓아 가다가,

   더 늙게 되면 인간애(人間愛)로 승화되는 것이 남녀 간의 사랑이니까,’

   그렇다. 인간애로 승화되는 사랑을 베풀자!

   그 사랑은 가족에게서부터 실천해야 한다.

   자신과 가족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이웃을 사랑하고

   공동체를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 위선(僞善)이다.

    그러나 그 사랑은 누구에게나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

   지워지고 수정되어 사라지고 변해가는 과정을 통해 완전한 작품이 탄생하듯,

   인간애(人間愛) 역시 그런 상실과 포기, 죽음과 상처의 과정과 시간이라는

   어둠의 터널을 통과해야만 생성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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