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감상문

by 김종복, 요셉 posted Apr 12,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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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찬미 예수님
사순시기와 그 안에서 본당 성령 세미나,
성삼일과 부활 대축일을 맞이하기까지 기다림과
긴장 속에 주님의 사랑을 받으며 숨 가쁘게 달려왔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부활 팔일 축제’의 마지막 날인
부활 제2주일이면서 하느님의 자비 주일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하느님의 사랑이 충만 하시길 기원합니다.

첨부한 메일은 ‘계간 진해 88호’(2015년 3월 발행)에 기고한
‘00, 그 강을 건너지 마오’ 영화 감상문이라 할 수 있는 졸필입니다.
시간이 되시면 열어 보시기 바랍니다.
 -2015, 4, 12일 김종복 요셉-

 

            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를 보고나서

                                                            -진해구 장천동 김종복-

‘명량’이라는 영화가 화제를 모으며 방화사상 유래 없는 흥행을 기록할 때, 그 영화를 본 후 이번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를 관람하기 위해 극장을 찾았으니 참 오랜만인 셈이다.

2014년! 유난히도 탈이 많았고 어수선했던 한해의 세밑에 노부부의 애틋하고 다소곳한 사랑 이야기가 입소문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진모영 감독)라는 영화였다.

이 영화는 당시 흥행 몰이를 하고 있는 ‘국제시장’에 비해 관객 동원에서 한참 밀려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는 일반 영화와 달리 다큐멘터리 (documentary)의 기적이라 불릴 만큼 연일 관객 기록을 경신했고, 예상과 달리 젊은 층 특히 20~30대의 관객에 힘입어 이변(?)을 낳은 작품이라는 것은 나중에 신문 기사를 보고 알게 되었다.

영화는 강원도 횡성의 산골마을에 76년간 부부라는 인연으로 오누이처럼 살아온 고(故) 조병만 할아버지(98세)와 강계열 할머니(89세)의 이야기다.

 

죽음의 강에 뛰어드는 남편을 향한 아내의 애타는 심정을 노래한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에서 따온 제목처럼, 하얀 눈이 속절없이 쏟아지는 할아버지의 묘 앞에서 흐느끼는 할머니의 울음소리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타임머신(Time Machine)처럼 시간을 거슬러 노부부의 봄날 같은 시절에서 출발한다. 같이 마당을 쓸다가도 낙엽으로 장난을 치고, 들꽃을 서로 머리에 꽂아주며 예쁘다고 좋아하거나 한밤중에 화장실 가는 것을 무서워하는 할머니를 위해 노래를 부르며 기다려주는 할아버지 모습은 순수하고 예뻐 보이면서도, 내 삶의 현실과 괴리(乖離)가 많이 있다는 사실에 영화를 보는 동안 함께한 그 사람에게 괜스레 미안하고 쑥스러웠다.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

공무도하(公無渡河) - 님아 강을 건너지 마오.

공경도하(公竟渡河) - 님은 결국 강을 건너시네.

타하이사(墮河而死) - 물에 빠져 돌아가시네.

당내공하(當奈公何) - 가신님을 어찌할꼬!

 

영화 속에서 노부부는 서로 존댓말로 예우하고, 어디든지 나설 때면 서로의 손을 꼭 잡는 다정한 모습은 마치 엄마의 손을 잡고 걷는 아이 같았고, 그렇게 한 걸음씩 내딛는 아름다운 그 모습은 오랫동안 연습(?)에서 온 결과처럼 어색하지 않는 순수한 모습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노부부의 삶의 여정에서 스며드는 슬픔과 애틋한 그리움이 교차하며 가슴속 심연(深淵)을 파고들어 눈시울을 붉히게 만들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여전히 작은 불만과 투정으로 티격태격하는 우리 부부의 모습이 떠올랐고, 토라짐과 화해가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이제껏 알게 모르게 나의 야당이자 비평가이며 버팀목이 되어준 아내가 ‘고맙고 감사한 존재’라는 사실을 각인(刻印)할 수 있었고, 그렇게 새삼스레 눈을 뜨게 된 것은 나에게 큰 선물이자 위안이었으며, 또한 많은 것을 생각하며 영화를 보는 동안 몇 번이나 눈시울을 붉히고 함께한 그 사람 몰래 눈가를 훔치는 시간이 되었다.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는 1년 여 간 노부부를 관찰한 진모영 감독의 영화 속의 삶의 이야기는 잔잔한 감동과 교훈적이다.

외출할 때 상대의 신발을 돌려놔주고, 보이지 않는 뒷머리를 매만져주고, 험한 길에서 손을 잡아주는 모습은 76년 세월 동안 매일 반복하면서 상대를 배려하고 포용하면서 자연스레 형성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봄에 피어난 새순이 여름의 비를 맞으며 성장했다가, 가을을 거쳐 겨울에 져버리는 것이 우리 인생과도 비슷하다.’는 할아버지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이들이 어떤 믿음을 가졌는지 알 수 없지만, 할머니의 울음이 언젠가 기쁨으로 바뀔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영화를 보는 동안 비익조(比翼鳥)와 연리지(連理枝)가 떠올랐다.

비익조와 연리지하면 부부가 하나 되는 사랑을 상징한다.

내가 비익조와 연리지라는 의미를 접한 것은 한자 공부에 심취하여 열성으로 임했던 시절, 벌써 10여 년 전 박00 선생님으로부터 그 의미를 상세히 알고 깊은 감명을 받은바 있다.

부부간의 사랑을 비유하는 말에 '비익연리(比翼連理)'라는 말이 있다.

비익조(比翼鳥)라는 새와 연리지(連理枝)라는 나무를 합친 말이다.

비익조는 전설 속의 새이다. 이 새는 눈도 하나요, 날개도 하나뿐이다.

그래서 암수 한 쌍이 한데 합쳐야만 좌우를 제대로 볼 수도 날 수도 있다.

또 연리지란 나뭇결이 연결된 가지를 말한다.

뿌리가 서로 다른 나무가 허공에서 만나 한 가지로 합쳐진 나무이다.

부부는 다른 집안 다른 환경에서 나고 자랐지만, 결혼을 해서 한 가정을 이루게 되면 연리지(連理枝)처럼 한 몸을 이루어, 비익조(比翼鳥)와 같이 서로 부족한 점을 채워 주는 관계를 상징적으로 의미하는 것이다.

 

내가 피아골의 연곡사(鷰谷寺)를 찾은 것은 오, 육년 전의 일이다.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다를 일 때문에 인근에서 하루를 묵을 때였다.

한 시간 정도 짧게 머무른 시간이었는데 인솔자는 마침 그곳(연곡사) 주련(柱聯:기둥이나 벽 따위에 써 붙이는 글씨)에 있는 다음과 같은 글을 함께한 일행에게 소개했다.

“역천겁이불고(歷千劫而不古) ;천겁을 지나도 옛날이 아니요, 긍만세이장금(亘萬歲而長今) ;만세를 뻗쳐도 항상 오늘이다.”

당시 설명을 기억하건대 겁(劫)은 아주 긴 시간의 단위로, 가로 세로 40리가 되는 바위 위에 100년 마다 한 번씩 하늘의 선녀가 내려와 그 선녀의 옷자락으로 바위가 모두 닳아 없어지는데 소요되는 시간 보다 더 긴 시간으로, 수억 년을 뒤로 거슬러 올라가도 옛날이 아니며, 수억 년을 앞으로 나아가도 항상 지금이다. ‘미래는 아니다’라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거기에 덧붙여 이런 얘기를 들려주었다.

세상에는 ‘세 가지 ‘금’이 있습니다.

“부(富)를 상징하는 ‘금’이 있고, 음식에 간을 맞추는 ‘소금’이 있으며, 현재를 뜻하는 ‘지금’이 있는데 여러분은 어느 것이 가장 소중한 ‘금’인가요?” 라고 질문을 한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어느 것이 가장 중요한 ‘금’인지 러시아의 대문호이자 사상가인 톨스토이가 만년에 쓴 단편 ‘세 가지 질문’을 통하여 그 답을 찾아보자.

황제가 신하에게 세 가지 질문을 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때는 언제인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첫 번째의 물음에 대한 답은 ‘지금’이고, 두 번째의 답은 ‘바로 내 곁에 있는 사람’이며, 세 번째의 답은 ‘그 사람을 위하여 좋은 일을 하는 것’이었다.

결국 지금 이 순간 우리 자신이 만나는 사람에 대한 최선의 노력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것이다.

 

영화를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이런 우화(寓話)가 생각났다.

소와 사자가 있었는데 둘은 죽도록 서로를 사랑했다.

둘은 최선을 다하겠다고 장래를 약속하고 결혼해 살았다.

소는 최선을 다해 가장 맛있는 풀을 날마다 사자에게 대접했고, 사자는 싫었지만 참고 먹었다.

사자도 최선을 다해 사냥해서 맛있는 살코기를 대접했고, 소도 괴로웠지만 참고 먹었다.

그러나 사자고 소도 참을성이 한계에 도달했다.

소와 사자는 다투게 되고 끝내 헤어지고 맙니다.

그들은 헤어지면서 “난 당신에게 최선을 다했어!”라고 말했습니다.

소는 소의 눈으로만 세상을 보고, 사자는 사자의 눈으로만 세상을 보면 세상은 혼자 사는 무인도의 삶입니다. 곧 소의 세상, 사자의 세상 일 뿐입니다.

자신을 위주로 생각하는 최선! 그 최선은 최선일수록 최악을 낳고 맙니다.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無關心)일 것이다.

우리가 사랑을 베푼다는 것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다.

사랑은 메마른 대지를 풍요롭게 적시는 단비 그 자체다.

행복(幸福)도 생각하기에 따라 가까이에서 쉽게 찾을 수도 있고, 잡을 수 없을 만큼 멀리 있을 수도 있다.

내가 갖지 못한 것보다 내가 가진 것에 더 감사하며 산다면, 어느새 행복은 우리 마음에 문을 두드리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사랑은 연습에서 오고, 사랑은 유치(幼稚)한 것’이라고 했다.

유치한 것은 다른 말로 바꾸면‘나이 어린 아이들의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나이 어린 아이들의 행동이 모이는 집합체가 유치원(幼稚園)이다.

거기엔 해맑은 눈동자와 순백의 설원처럼 세속적인 것에 전혀 오염되지 않은 마음을 가진 천사 같은 아이들의 놀이터가 아닌가.

그런 유치한 마음과 유치한 시선으로 오늘, 아니 지금 이 시간, 아내에게‘여보 당신이 내 곁에 있어줘서 고맙구려!’라고 진심어린 감사를 표하며 아내의 손을 잡아보자.

“혼자가면 빨리 갈 수 있지만 함께 가면 멀리 갈 수 있다”는 아프리카 속담이 여느 때 보다 내 작은 가슴에 깊이 다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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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감상문.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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