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령성월(慰靈聖月)을 맞으면서

by 김종복(요셉) posted Nov 03,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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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령성월(慰靈聖月)을 맞으면서

     햇살은 잠자리 날개처럼 바스락거리고 이마에 닿는 바람은 서늘하다.

    늦가을의 아름다운 경치를 일컫는 만추가경(晩秋佳景)이란 말에는

    ‘늦게 핀 꽃이 더 아름답다’라는 의미도 있을 것이다.

    그럼, 단풍보다 더 늦게 핀(?) 낙엽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전할까?

    덧없이 흐른 시간 속에 산과 숲을 고운 자태로 물들였던

    만산홍엽(滿山紅葉)은 이제 낙엽이 되어 발아래서 바스락거린다.

    그런가 하면 가을걷이가 끝난 벌판에는차가운 바람과 함께

    그루터기만 만나 을씨년스럽고 황량(荒凉)하기 그지없다.

    꽃피고 열매 맺는 절정의 시기를 지나 잠시 숨고르기를 하며 사색하는 계절이 지금이라고 느껴진다.

    때맞춰, 우리의 고유 전통풍습에 11월은 음력 시월상달로 5대 이상의 조상 산소에 제(祭)를 올린다.

    조상의 제를 모시며 자신을 포함해 삼라만상의 기몰(起沒)과 생멸(生滅)과 시종(始終)을 생각하며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파노라마처럼 적나라(赤裸裸)하게 되돌아보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20181102_222312.png                    <성직자와 수도자 묘지에서 바라본 '부산교구 언양 하늘공원 성당'(납골 봉안당)>

                                   

      가을에서 겨울로 접어드는 11월, 푸른 생명을 다하고 힘없이 떨어지는

     낙엽은 죽음을 연상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생명의 시작을 알리기도 한다.

     가톨릭교회가 11월을 위령성월(慰靈聖月)로 지내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세상을 떠난 가족이나 친지들의 영혼은 물론, 죽은 모든 영혼과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연옥(煉獄) 영혼을 위해 기도함과 동시에, 살아있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도 묵상하는 달이다.'

     꼭 가톨릭 신자가 아니라도 이 조락(凋落)의 계절, 애잔하게 벌거벗은

     나뭇가지와 찬바람에 날이며 구르는 나뭇잎을 보노라면 사람의 생애도

     저와 같다는 생각이 스치면서 겸허히 신(神)의 자비를 청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회개(悔改)이며 심판(?)의 시작이 아니고 무엇이랴.

     자신의 양심이 평안하면 죽음을 크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그 심판 앞에서 떳떳하고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죽음은 모든 인간이 가장 무서워하는 절대적인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자신의 생이 끝나면 모든 것이 끝나 버리기 때문이다.

    죽음은 세상에서의 모든 사람과, 그리고 자신이 남겨 놓은 모든 것과의 완벽한 이별이기에,

    그래서 모든 인간은 당연히 죽는다는 것을 아는 기정(旣定) 사실이지만,

    자신의 죽음이나 가족의 죽음은 가장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다.

    이러한 죽음과 인생의 행복을 함께 묵상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죽음을 기억하는 것은 우리의 실존을 확인하고, 삶의 무상함을 떠올려서

    오늘은 사랑하며, 오늘을 충실하게 살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소포클레스’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헛되이 보낸 오늘 하루는 어제 죽어간 이들이 그토록 바라던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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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산 하늘공원 성당(납골 봉안당) 1층 피에따 상, 아래로 내려가면 봉안당>

 

    시간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오늘의 삶이 어제의 결과이고,

     또 오늘 삶의 결실이 내일로 다가온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오늘의 삶을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미래에 대한 불안은 늘 우리 안에 엄습(掩襲)한다.

    내가 나이 들어서도 외롭지 않게 살 수 있을까? 내가 병들었을 때 누가 나를 챙겨 줄까?

    이러한 미래의 불안은 자신의 죽음을 생각할 때 절정에 이를 것이다.

    분명한 것은 희망이 머무르는 자리는 지금 이 시간, 우리가 머무르고 있는 현재다.

    오늘을 사는 우리가 지금 이 시간에 충실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과거가 절망 가득한 구덩이든, 앞을 가로막는 절벽이든 상관없다.

    희망은 절망의 땅에서 피어나는 꽃이며, 그 거름을 먹으며 자라나는 생명의 나무이기 때문이다.

 

    잠시 화제를 바꿔 큰 반향(反響)을 일으킨 영화 '나의 산티아고'를 소개한다.

    나의 산티아고(원명 : I'm Off Then)는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던

    독일 코미디언 ‘하페’의 '산티아고 순례길' 여행기이다.

    한 인물의 여정을 담고 있지만 단순히 순례길을 걷는 영화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부와 명성을 다 가진 주인공 하페는 어느 날 과로로 무너진다.

    급기야 죽을 수도 있다는 진단을 받자 숨 가쁜 일상을 일탈(逸脫)하여  

    치유와 위로의 길, ‘산티아고 순례길’ 여정에 오른다.

    세계인의 버킷리스트에서 빠지지 않는 산티아고 순례길!

    일명‘카미노 데 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라 불리는데,

    직역하면‘야고보 사도의 순례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예루살렘, 로마와 함께 그리스도교 3대 순례지로 꼽힌다.

    199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되었으며 종착지에

    ‘산티아고 대성당’있고 여기에 ‘야고보 사도’의 유해(遺骸)가 안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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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산교구 언양 하늘공원 >

 

    여러 길 가운데 널리 알려져 있고 가장 많이 걷는 길이 ‘프랑스 길’로 프랑스 남부

    ‘생장 피드포르’에서 스페인 서북부 대서양과 인접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향하는 800여 km의 멀고 험난한 여정이다.

    전 세계에서 종파(宗派)와 인종을 가리지 않고 한 해 20여 만 명이 순례 여정에 오른다고 한다.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멀고도 험난한 산티아고 순례길을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걷는다는 것은 물리적인 공간뿐 아니라 자신의 내면(內面)의 길을 찾아 가게 된다.

    그래서 헐벗음의 훈련이라고 한다.

    고난의 도전을 통한 좌절과 희망, 깨달음 속에 자아(自我)를 찾는다.  

    영화 속 주인공이 겪는 악전고투(惡戰苦鬪)는 어떤 이들에겐 추억과 함께

    새로운 도전의식을 이끌어내고, 젊은 세대뿐 아니라 중,

    장년층들에게까지 재기할 용기와 삶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한다.

 

    길 위에서 사람을 만난다는 말이 있다. 일상 걷는 길이든, 여행길이든, 인생길이든,

    길은 혼자 걷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이 오가는 길이며 그 길에서 만난 모든 사람들은

    국적과 종교와 이념을 넘어 하나의 순례자, 동행의 순례자가 된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이들은 자신의 염원(念願)을 가슴에 안고 저마다 변화를 얻는 길이며,

    많은 것을 내려놓을 수도 있고, 가슴 가득한 무언가를 얻어 갈 수도 있는 길이다.

    주인공 하페는 고난과 환희의 산티아고 순례 여정을 42일 만에 완주한다.

    이것은 주인공의 좌절이자 희망의 기록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갈등과 고통과 번뇌의 길 위에서 주인공은 되뇌곤 한다.

    "인생은 짧아!(Life is short), 인생은 짧아!(Life is short)라고.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에 직면해 있다고.

    우리에게 있어서 죽음은 미지의 영역이기에 여전히 두려움으로 남아있지만,

    역설적(逆說的)으로 죽음이 있기에 우리는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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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해 남문 세스페데스(1593,12,27 : 최초로 우리 땅을 밟은 스페인 선교사) 공원 기념탑>

 

    나는 연령(煉靈)회원으로서 상(喪)이 나면 회원들과 함께 장례식장을

    방문하는 것부터 하관예절(下官禮節)에 이르기까지 유가족과 동행한다.

    망자를 하늘 길로 보내는 어느 장례식장에는 구슬프면서도 아름다운(?) 연도가 끊이지 않아 심금을 울리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장례식장을 찾는 이가 거의 없을 뿐만 아니라 장례미사가 끝나고 화장장 가는 마지막 길마저

    동행자가 없어 참으로 외롭고 적막이 흐르는 모습을 볼 때면 안타깝고 슬프다.

    그런가 하면 영원한 결별 앞에서 오열하는 유가족들 앞에서 어떤 위로도

    쉽사리 전하지 못하지만 그들에게 말없이 손을 잡아 줄 뿐이다.

    부활에 대한 희망을 이야기하기엔 남겨진 자들의 슬픔이 더 커보였기 때문이다.

    부활을 말해도 실제로 죽었던 이들이 다시 살아나 가족들 앞으로 되돌아올 가능성은 없을 테니까.

    그렇다면 남은 자들에게 부활(復活)은 어떤 의미 일까?

    산 이들은 죽은 이들의 삶을 가슴 속에 간직하고 산다.

    죽음과 삶은 그렇게 다시 만난다.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말씀은 바로 그런 의미가 아닐까?

    우리가 죽은 이들을 기억하고, 우리 삶에 영향을 받고 있다면 그들은 우리와 함께 살아 있는 것이다.

 

    나는 가끔 ‘혼자가면 빨리 갈 수 있지만, 함께 가면 멀리 갈 수 있다.’는 아프리카 속담을 음미하곤 한다.

    그 이야기 한 토막을 여기에 담는다.

    히말라야를 넘나들며 복음(福音)을 전한 인도의 성자(聖子) ‘썬다싱(Sundar Singh)’의 일화이다.

    눈보라가 치는 어느 날,  그는 히말라야 산길을 넘어 가게 되었다.

    마침 방향이 같은 여행자가 있어 두 사람은 동행을 하게 된다.  

    얼마쯤 갔을까 눈 위에 쓰러져 죽어가고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썬다싱은 동행자에게 “우리 이 사람을 같이 데려 갑시다.

    그냥 두면 분명 죽고 말 것이요.”하고 말하자, “미쳤소?

    우리도 죽을지 살지 모르는 판국에 한가하게 누구를 도와준단 말이오!”하며 화를 내면서 서둘러 가 버렸다.

    그는 쓰러진 사람을 일으켜 등에 업고 사력을 다해 발걸음을 옮겼다.

    눈보라는 갈수록 더 심하고 이젠 정말 걷기조차 힘들었다.

    무거움을 참고 견디다보니 온 몸에서는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등에 업힌 사람의 얼었던 몸이 썬다싱의 더운 체온으로 점점 녹아 의식을 회복하게 되었다.

    마침내 마을 가까이 왔을 때 그들은 얼어 죽은 시체 하나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는 먼저 가버렸던 여행자였다.   

    혼자서 먼저 가버렸던 그 여행자는 얼어 죽었고

    죽어가던 사람을 업고 간 썬다싱은 서로의 체온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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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5월 어버이날 미사>

 

    그렇다. 나도 힘들지만 더 절박한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

    미루지 않고 지금 바로 다가서는 마음에서 생명의 싹이 틀 것이다.    

    상대방에 대한 나의 작은 배려와 나눔이 그에겐 삶의 희망과 용기를 만들어 줄 것이며,

    나의 사랑과 관심이 상대방에게 위로와 격려를 가져다줄 것이다.

    인생은 외로움 속의 한 순례자(巡禮者)의 여정이다.

    창조주에게서 생명을 받은 우리는 이 여정을 마치면 다시 창조주의 나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이승의 짧은 삶을 마치면, 빈손으로 떠나는 것을 생생하게 목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순간 내 주머니 안에 있는 것을 내 생명처럼 지키며 살아간다.

    삶의 마지막에는 아무것도 챙기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그럼에도 손에 움켜쥔 것을 놓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내 의지보다 강한 본성(本性)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도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다시 눈을 들어 창밖을 바라본다.

    나뭇가지에 붙어있는 잎사귀에서 세상에 계시지 않는 어머니의 메마른 손이 겹치고,

    바닥을 스치는 낙엽에서는 자식들을 걱정하던 생전의 어머니의 산란(散亂)함이 묻어있다.

    만추의 계절! 아파트 사이로 햇살 한 줌 내리쬐고 시리도록 차갑게 느껴지는

    파란 하늘에 걸린 하얀 구름이 사위는데 노란 국화가 소담스럽게 피어 있다.

    사랑이 머무르는 공간에서 사랑이 되기 위한 작은 노력이 국향처럼 번지기를 바라본다.

    이렇게 인생은 만추(晩秋)를 향해 가는데 한해를 갈무리할 시간이 성큼 다가 왔다.

    삭풍(朔風)이 부는 세밑에 상대방에 대한 나의 작은 배려와 나눔이 어떤 이들에겐 삶의 희망과

    용기를 만들어 줄 것이며, 나의 사랑과 관심은 상대방에게 위로와 격려를 가져다줄 것이다.

    긴 넋두리를 마치며 찰리 채플린의 유명한(?) 명구(名句)

    ‘인생은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라는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2018,11,2일 합동위령미사를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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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당의 날 기념 뮤지컬, '사도 베드로' 출연진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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