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시 순례(3) -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Basilica di San Francesco)

by 김종복(요셉) posted Dec 10,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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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시시 순례(3) -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Basilica di San Frances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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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시시의 전망대라 일컫는 ‘로카 마조레 성’(城)에서 바라본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아시시! 종교와 이념, 민족과 빈부의 벽을 넘어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진리와 선,

그리고 사랑과 평화를 구현하고 있는 축복의 땅이다. '이탈리아의 푸른 심장'으로 불리는

아시시는 성 프란치스코(1182~1226)와 성녀 클라라(1194~1253)의 고향이다.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 지방 페루자의 작은 구릉지대에 자리잡은 아시시는

중세 도시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대리석이 깔린 넓은 광장, 그 주변으로 뻗어 있는

좁은 골목길. 그 양편으로 나란히 줄지어 서 있는 중세 건물들. 동화 속 풍경같이 빼곡한 성물 가게와

 2층 발코니마다 햇살을 듬뿍 머금고 있는 화분들. 그 모습이 새벽 공기를 달구는

따스한 아침 햇살만큼이나 싱그럽고 평화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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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수백만의 순례자가 찾아오는 신앙의 도시 아시시의 언덕길을 올라서면 돌로 된

프란치스코 수도원과 대성당을 만나게 된다. 대성당은 특이하게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간결하게 지어진

아래 성당(1층)과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위 성당(2층)이 포개진 모습이다. 1228년 성전 건축의 초석을 마련한 후

22개월만인 1230년에 건립된 아래 성당은 중앙통로만 있었고, 제단 3m 아래에 성인의 유해를 안치,

1236년 위 성당의 지붕이 덮어졌고, 1239년에 종각이 완성되었다.

 

오늘날 프란치스코 대성당이 자리한 곳은 원래 아시시 외곽으로 모든 사람들이 다 기피하던

‘죽음의 언덕’이었다. 이곳에 성당이 자리하게 된 것은 성인의 유언 때문, 평생 누더기를 걸치고 가난하게 살던

프란치스코 성인은 예수님께서 해골산에서 돌아가시고 묻히심으로써 새 생명을 피워냈듯이 자신 또한

 버려진 ‘죽음의 언덕’에 비천하게 묻히기를 원하였기 때문이다. (자료:굿 뉴스 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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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층 성당 전면에서 바라본 ‘프란치스코 대성당’>

200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은 프란치스코 수도회를 창립한

 ‘성 프란치스코’를 기리며 세워진 프란치스코 수도회 최초의 성당으로, 온통 힌 빛으로 소박하면서도 엄숙함을

잃지 않는채 언덕위에 웅장하게 서 있다. 입구를 흰 대리석을 깔아 성당으로 다가가는 마음까지

경건하게 만들고 인간의 영역이 아닌 신의 영역인 듯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을 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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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디 광장에 자리한 프란치스코의 기마 동상>

청년 시절의 프란치스코는 세상적인 명예와 성공을 추구한 나머지 두 번의 전쟁에

참여하였지만 결국 포로로 잡혔다가 병을 얻고, 그 어버지가 몸값을 치러 줌으로서 풀려났다.

거의 죽음의 문턱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아시시로 귀환하던 그 날은 그의 생애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 당시 프란치스코의 심정을 절절하게 전해주는 것이 바로 대성당 앞 광장에 패잔병으로

귀환하는 프란치스코의 기마상이다. 말 위에서 방향 감각을 잃은 프란치스코, 어디로 가야할 지 모른 채 끝이

보이지 않는 심연으로 떨어질 듯 푹 숙인 고개와 축 처진 어깨, 땅이 꺼져라 내뱉는 한 숨 소리가 지금

귓가를 맴도는 듯하다. 명예와 출세라는 야망이 실패로 끝난 쓴 체험이었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를 하느님 나라를 위한 기사로 쓰시려고 이런 모습으로 부르고 계셨던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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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2층 성당 입구 잔디 광장>

 경사진 언덕에 조경 수목을 이용해 타우 십자가(Tau Cross) 와 PAX(평화)라는 글자를 조경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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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 위층(2층) 성당>

지옥의 땅을 성지로 변모시킨 프란치스코 대성당은 큰 규모로 지은 아래성당,

마치 환희와 자비의 세계를 표현하듯이 광대하게 지은 위(2층) 성당으로 되어 있다.

2층 성당 제대 좌,우에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생애를 담은 ‘지오토’의 프레스코화 28점이

 장식돼 있으며, 1층 성당에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무덤과 그리스도의 탄생, 유아대학살,

프란치스코의 죽음 등을 다룬 프레스코화가 있다. (사진 출처:가톨릭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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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층(2층) 성당 중앙 제대 –  사진 촬영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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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오토’의 프레스코화 - 교황을 알현하고 수도회칙을 인준 받는 프란치스코>

프란치스코회는 1209년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와 그의 동료 12명과 함께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게 복음적 생활 양식을 구두로 인준받음으로써 공식적으로

교회 안에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이후 이들은 회개의 삶을 몸소 실천하고 형제애를

 세상에 드러냄으로써, '작은 형제들'의 수도회로 뚜렷이 확장되고 발전되게 된다.

 

 4차 라테라노 공의회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223년 11월 29일,

교황 호노리오 3세는 성 프란치스코가 작성한 회칙을 최종적으로 승인하게 된다.

 이 회칙이 바로 “인준받은 회칙”(Regula Bullata)이다.(자료:작은 형제회)

 

2층 성당에는 이탈리아 피렌체 출신, ‘지오토 디 본도네’(Giotto di Bondone)가

프란치스코 성인의 생애를 묘사한 28개 작품이 있다. 프레스코화는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사진 촬영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눈으로만 감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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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오토’의 프레스코화 - 성녀 클라라의 애도를 받는 성 프란치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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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오토’의 프레스코화 - 프란치스코의 죽음과 승천>

                               프란치스코가 죽음을 맞는 순간 수도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성자의 영혼이

                                             빛나는 별의 모습으로 하늘을 향해 올라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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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대성당 아래층(1층) 성당 내부 - 사진 출처:굿 뉴스 자료실>

대성당 1층에 들어가면 성 마르티노 소성당, 성녀 막달레나 소성당, 성모 마리아와

 성 프란치스코의 벽화, 그리고 중앙 제대와 아치형 천장이 있고, ‘석양의 성모’ 등의 벽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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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층(1층) 내부 - 중앙 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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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층 성당 - 피에트로 로렌제티((Pietro Lorenzetti) 작(作) - ‘성모자와 두 성인’>

일명 ‘석양의 성모’로 많이 알려진’(성모자와 사도 요한과 성 프란치스코) 이 성화에는 두가지 일화가 있다고 한다

첫째, 아기 예수님이  "엄마, 엄마, 요한하고 프란치스코하고 누가 더 좋아?“ 성모님께서는 두사람 앞에서

말씀하시기가 곤란하시어 엄지 손가락으로 프란치스코 성인을 가리키시는 모습이고,

두 번째는 이  성화 속에서 사도 요한은 묶여있는 성서를 들고 있다,

그러므로 살아 계시는 복음은 프란치스코 성인을 나타낸다고…

성인의 손에 오상의 표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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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층 제대 우측의 ‘치마부에’ 작품 -성모자와 네 천사와 함께한 프란치스코>

  성모님과 예수님이 화폭의 주인공이지만,  한 쪽에 서있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모습으로 더 유명한 작품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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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성인의 유해가 모셔져 있는 지하 경당>

지하 무덤으로 내려가면 올라가는 계단과 내려가는 계단 사이에 ‘야고바’ 부인의 유해함이 있다.

(야고바 부인-로마의 귀족 부인, 프란치스코 후원자) 몇 계단을 더 내려가면 중앙 기둥의 석관이 성인의 무덤이고

그 옆 모퉁이에는 네 명의 형제가 묻혀 있는데 각각 레오, 마쎄오, 루피노, 안젤로 형제들이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지금의 ‘천사들의 성모마리아 대성당’ 안에 있는 포르치운쿨라 경당에서 1226년 10월 3일

죽음을 맞이했다. 영면 뒤 아시시의 ‘성 지오르지오’ 성당에 안장되었다가 1230년 지금의 프란치스코 대성당으로

이장되었다. 사후(死後) 2년 뒤, 1228년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자료 출처:굿 뉴스 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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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란치스코 무덤 경당에서 기도와 묵상 후, 기념으로 사진을 남겼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숭고함과 엄숙이 묻어나는 성인의 무덤 경당에서 순례자들은 간절한 기도를 드린다.

성인의 무덤을 붙잡고 기도하는 사람, 의자에 앉아 기도하는 사람, 무릎 끓고 기도하는 사람 등 기도하는 자세는

 저마다 달라도 간절하게 염원하는 원의(願意)가 이루어지길 소망하는 마음은 다 같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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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띠 조각과 클라라 성녀가 만들어준 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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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프란치스코의 임종복(臨終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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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순례를 마치고 1층 입구 계단에서 기념을 남겼다>

 

 

                                                       성 프란치스코 생가

1182년 태어난 ‘프란치스코’의 생가(生家) 문제는 아직도 논쟁거리라고 한다.

아시시의 여러 곳이 생가로 언급되고 있는데, 이들 중에는 ‘키에사 노바’(Chiesa Nuova, 새 성당)

‘산 프란치스코 피콜리노’(San Francesco Piccolino, 아기 성 프란치스코 경당) 이 있다. 이 모든 가상의 생가들은

 ‘피아짜 델 코무네’(코무네 광장)라고 불리는 아시시의 중앙광장 근처에서 발견되었다. 이 광장에는

옛 미네르바 신전과 ‘토레 델 포폴로’(시민의 탑)가 가장 높게 솟아있다.(자료:굿뉴스 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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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프란치스코 생가 경당 – ‘성 프란치스코 피콜리노’(San Francesco Piccolino) 경당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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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세기 초 고딕양식의 성 프란치스코 피콜리노(San Francesco Piccolino)경당 아치형 문>

이 소성당은 프란치스코가 태어난 외양간을 개조한 곳으로, 아치 위에는 라틴어로  “이 소성당은 소와

당나귀가 있던 마구간으로 세상의  거울이 되신 성 프란치스코가 태어난 곳”이라고 씌어져 있다.

(사각의 노란색 표지는 담벽에 있는 ‘성 프란치스코 피콜리노 경당’표지를 첨부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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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프란치스코 피콜리노 경당’ 내부>

 

 

                         성 프란치스코 생가 성당 - ’키에사 노바’(Chiesa Nuova, 새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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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프란치스코 생가 성당으로 가는 길 건물 사이로 새성당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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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시시 ‘새 성당’(성 프란치스코 생가) 외부 – 노란색 원안은 프란치스코 부모상이 는 곳이다>

새 성당은 1615년 세례자 요한 비니의 소유였던 한 오래된 집터 위에 건축되었다.

옛집의 흔적은 현재 반원형 후진에 남아 있다. 1570년 ‘루이지’의 증언에 따르면 성 프란치스코의

아버지인 부유한 포목상 ‘피에트로 베르나르도네’(Pietro Bernadone)의 집터가 있던 곳이다.

 

세례자 요한 비니는 1615년 이곳에 성당이 건립될 수 있도록  작은 형제회에 집터를 팔았다.

성당 전면은 르네상스 양식으로 규모에 비해 수수하고 우아하다.  성당 안은 그리스 십자가 형태로 밖으로

드러나지 않은 네 개의 작은 돔과 하나의 중앙 돔으로 되어 있다. 새 성당 앞 광장 한 쪽에 있는 성 프란치스코의

부모상은 1983년에 세워진 것이다. 성당 내부 왼쪽 벽에 프란치스코 성인이 갇혀 있던 독방이 있고,

     그 오른쪽으로 창살이 설치된 문이 원래 ‘베르나르도네’의 집 대문이었다.

 (자료:굿 뉴스 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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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 성당’(성 프란치스코 생가) 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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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란치스코 성인 생가 성당 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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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프란치스코가 아버지로 부터 감금 당했던 장소 안에는 성인의 형상과 십자가가 있었고

                              누군가에 의해 십자가 성인에게 장미 한 송이가 봉헌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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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 성당’ 광장 담벽에 있는 성 프란치스코의 부모상은 1983년에 세워진 것이라고 한다>

 

아시시 순례를 마치고 떠나면서!

종교와 이념이 다른 많은 순례자들이 이탈리아 중부의 작은 도시 아시시로 모여든다.

순례자들은 아시시의 이곳저곳을 옮겨다니면서 돌에서조차 신비로운 흔적들을 발견해 나간다.

 좁은 골목 길의 침묵과 성당의 어스름함은 평온함과 평화로 가득하다. 창가에 놓인 꽃들과 술래잡기하듯

여기저기서 울려 퍼지는 성당의 종소리는 기쁨의 찬가이며, 끊이지 않는 삶의 노래였다.

그런 아시시에서는 어느 누구도 이방인이 될 수가 없었다.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잔디 광장은, 그곳에 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마치 팔을 벌려 안아주는 어머니의

숨결 같은 곳이었다. 그런 아시시는 영적으로 ‘성벽이 없는 도시’의 대명사로 영원히 남을 것이며, 현재도 예루살렘과

베들레헴과 나자렛 다음으로 이 세상의 그리스도교 도시들 중에서 가장 사랑받는 도시라는 생각이다.

 

 ‘빈자들의 친구’ 프란치스코 성인과 글라라 성녀가 살고, 죽고, 묻힌 곳! 오직 자신을 평화의 도구로 써 주기를

간절히 바랐던 프란치스코 성인과 클라라 성녀의 숨결이 배어 있어서인지 아시시는

도시 전체가 거룩하고 평화로운 수도원 같았다.

 

순례를 마치고 버스에 몸을 싣고도  떠난다는 실감이 나지 않는다. 성 프란치스코와 성녀 클라라에 대한

 삶과 죽음과 성인 성녀의 성심의 감동이 내 작은 가슴의 심연에서 솟구쳐 오르고 있어서 일까…

종교와 이념, 민족과 빈부의 벽을 넘어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진리와 선, 사랑과 평화를

구현하고 있는 축복의 땅, '이탈리아의 푸른 심장' 아시시여, 영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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