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내기 연령회원이 바라본 연도(煉禱)

by 김종복(요셉) posted Feb 09,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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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내기 연령회원이 바라본 연도(煉禱>>

   나는 본당 새내기 연령회원이다.

   본당 연령회원 중 어느 자매는 20여년을 봉사하고 있으며,

   지금의 연령회장도 부인과 함께 7년째 봉사활동을 하고 있으니

   이제 1년이 안된 나 자신은 연령회원이라고 명함도 내밀지 못한다.

   지난해 11월 본당 할머니 신자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지상에서

   마지막 함께한 장례미사가 있었고, 상복공원(화장장)에 이어

   경화동 언덕 위 천주교 공동묘지 안장까지 동행하며

   고인의 마지막을 길을 기도하고 배웅했다.

 

   안장(安葬) 예식이 끝나면 유가족을 위로하고

   본당으로 돌아와 뒷정리를 하면 오후 3~4시가 된다.

   이후 몇 명되지 않은 회원들이 텅 빈 성당에서 일정을

   잘 마칠 수 있도록 함께해주신 주님께 감사 기도를 드린다.

   나도 오늘 하루를 돌아보면서 많은 생각들이 점철(點綴)되어

   허전하고 아쉬운 혼란에 휩싸여 제단의 주님을 응시(凝視)할 수밖에 없었다.

   삶의 마지막이 안타깝고 허무하다는 넋두리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어느 분의 장례식장에는 연도하는 신자가 거의 없는가하면,

   장례미사가 끝나고 상복공원(화장장) 가는 길은 연령회원을

   제외하면 본당 신자 한 사람도 동행하는 않은 경우가 있다.

   동행 여부는 망자나 유가족과의 관계 형성에 관한 일이라

   뭐라 단적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승의 마지막

   길을 외로이 가는 망자의 모습보다 더 안타까운 것은 저승을

   향한 망자의 유가족 중 가톨릭 신자가 한 사람도 없다보니

   장례미사 중, 성체를 모시는 가족도 당연히 없다는 것이다.

   짧은 기도시간 이런저런 안타까운 혼란의 상념(想念)이

   나를 엄습(掩襲)하며 감싸고 있다.

 

   장례식장을 찾아 드리는 신자의 연도(煉禱)와 장례미사,

   상복공원에서 안장(安葬)에 이르는 길고도 짧은 여정 속에는

   가톨릭 신자보다 비신자가 더 많다. 안장이 끝나고 헤어질 때

   그들의 공통점은 장례미사에 감동을, 성심을 다해 장례식

   마무리까지 도와주고 함께해준 일행에게 감사하며

   가톨릭에 대한 호감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들 중에는 가톨릭에 입문하고 싶다는 비신자도 만난다.

   유가족의 감사 표현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지만

   결코 ‘립서비스’(Lip Service)가 아니라는 것도 그들의

   표정에서 읽을 수 있다.

 

   문득 가요 한 구절이 떠오른다.

   “낙양산(洛陽山) 십리허(十里墟)에 높고 낮은 저 무덤아,

   영웅호걸 몇몇이며 절세가인(絶世佳人)이 그 누구더냐.....”

   누구든 한 번 태어나 한 번 죽으면 다 무덤으로, 흙으로 돌아간다.

   영웅도 범부도, 말없는 무덤이기는 매한가지다.

   삶과 죽음은 한 장 종이의 표면(表面)과 이면(裏面)일 것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표면에 어떤 그림을 그렸고 무엇을 남겼는가는

   억조창생(億兆蒼生) 모두 다르지만, 일단 이면을 넘기면

   흑암의 다 똑같은 칠흑(漆黑) 일색일 것이다.

 

   비록 이승을 떠나는 망자가 본당에 기여한 것이 없고,

   어느 신심단체에 속하지 않았다 해도, 인과관계가 없다고 하지만,

   인간적으로 망자의 구역을 대표하는 몇몇 사람들만이라도

   마지막 길을 함께 배웅한다면 망자는 물론이요, 그것을

   지켜보는 신자들과 유가족의 시선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내 넋두리는 허공을 향해 메아리 칠 뿐이다.

 

   옛말에 “정승 집의 개가 죽으면 문상객들이 문전성시(門前成市)를

   이루는데, 정승이 죽으면 아무도 오지 않는다.”란 말이 있다.

   우리는 이 말을 종종 듣기도 하고 인용하지만 정작 거기에

   담긴 깊은 의미를 애써 외면하고 지나친다. 이 말의

   일차적인 의미는 권력의 속성을 말하기도 하지만,

   자신의 삶 안에서 함께하는 이런저런 공동체와 이웃에게 얼마나

   베풀며 살았는지를 가늠하는 척도(尺度)가 되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인도의 민족운동 지도자이자 인도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받은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는 이런 말을 했다.

   “나는 그리스도를 사랑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많은 의미를 시사(示唆)하는 간디의 이 말은 편협(偏狹)한 사고와

   자기중심의 이기(利己)와 소위 끼리끼리 문화에서 벗어나지 못한

   일부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질책(叱責)이며 충고라고 봅니다.

 

   감히 말하자면 주일미사를 거르지 않고, 평일미사에 자주 참여하고

   신심단체 활동을 열심히 한다고 참 신앙인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참 신앙인은 마음이 따뜻한 사람, 말하기 보다는 들어주는 사람,

   하잖게 보이는 상대에게 눈을 맞추고 다가서는 사람,

   비록 작은 것이지만 자신보다 어려운 사람에게 나누는 사람,

   기쁨이 넘치는 자리에 함께하기보다 슬픔을 위로하고,

   눈물을 닦아주는 그 사람이 이 시대의 예언자이며,

   오늘날의 성인이요, 참 신앙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분들에게 하느님의 은총이 충만하시길 기원하면서,

   ‘혼자가면 빨리 갈 수 있지만, 함께 가면 멀리 갈 수 있다.’는

   아프리카 속담을 음미(吟味)합니다.

                      -새내기 연령회원 김종복 요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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