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회사 (2)

by 사목회장 posted Apr 04,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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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신해박해 (정조15년 서기1791)
 
한국 천주교회사는 한마디로 박해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
박해의 원인은 크게 두가지로 말할 수 있겠다
.
첫째, 천주교가 제사를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미풍양속을 해치는 그릇된 사교인점
.
둘째, 당파 싸움과 연결된 정치적인 이유이다
.
신해박해(진산사건) 1791년 전라도 진산지역 양반이었던 교우 윤지충(바오로) 사건으로 잘 알수있다
.
유교 전통에 의하면 부모가 세상을 떠나면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바쳐야함은 천민까지도 아는 일이었다
.
그런데, 윤지충과 그의 외종형인 권상연 야고보는 신주를 불태워 버리고 천주교예식으로 장례를 치르려했다
.
가족들과 동네 사람들로부터 불효 막심한 놈이라는 비난을 받으며 그는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받게 된다
.
이 사실을 관가에서 알게되자 체포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이사실을 알고 바오로 와 야고보는 충남 땅으로 피신할수 있었다

윤지충 집을 수색하던 관헌들은 본인들을 찾지 못하자 윤지충의 작은 아버지를 잡아 가두었다
.
모진 고문속에 작은아버지가 잡혔다는 소식을듯고 윤지충과 권상현은 관가에 나가 자수하였다
.
당대 최재공은 남인들의 보호를 위하여 사형 명령을 내렸고 정조 또한 사형을 명했다 사형취소 칙사를 보냈으나 이미 둘은 순교한 뒤였다

그해가 바로 1791 12 8일 전주 감옥에서 순교했다. (바로 정조15년인 서기 1791년의 일이다
.)

5. 주문모 신부의 입국과 전교 (정약종,최인길,최창헌 등)
 
주문모(야고보) 신부는 중국 소주 출신이다
.
그는 어려서 부모님을 여의고 할머니 슬하에서 자랐으며 품행이 단정하고,온순하였다

나이가 차자 결혼을 하었으나 3년만에 부인이 자식없이 사망하였다
.
이를안 주교님께서 그의 품행을 보고 추천 함으로서 신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
북경에서 설립된 북경신학교 학업을마치고 제1회 졸럽생으로 신부가되었다
.
1794
12월 주신부는 동지사 틈에 끼여 간교우 지황(사바)과 윤유일(바오로)을 만나서 23일 밤중에 역부차림으로 얼어붙은 압록강 얼음을 타고서 무사히 입국에 성공했다
.
서울에 도착한 주신부는 역관 출신 최인길(마티아) 집에 머물며 한국말을 배우며 성무집행을 하였으나
그때 배교자였던 한영익이 주문모 신부의 입국사실을 관헌에 고발하여 체포령이 내려졌다
이를 미리알게돎 최인길 의 집을 빠져나왔다
.
그리고 주문모 신부님은 강완숙 골롬바 집에 머물게 된다 (양반집 딸). 강완숙 골롬바는 홍지영의 후처로 살다가 이혼한 뒤 였다

강완숙은 그의 시어머나,본처의 아들 홍지철도 강완숙을 따라 함께살고 있었다
.
강완숙이 과부라는 사실 때문에 검문을 피해 성무집행을 할수있게되었다.(6여년 동안) 한편, 지황과 윤유일은 체포된 뒤 고문끝에도 주신부의 거처를 말하지 않았고 1795 6 25일 매를 맞고 순교하였다.(최인길 역시 장살로 순교함
)
주신부는 자신 대문에 박해 당한다고 생각하고 고국으로 돌아가려다 으금부로가 자수를 하였고 새남터에서 칼을받고 장렬하게 순교하심.(군문효수
)
당시 주신부과 초대 여회장(강완숙 골롬바) 크게 활약하던 당시 천주교 신자수는 4,00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
그의 아들 홍필주와 시어머니를 입교시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