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는 땅이 얼마나 필요한가
가을이 왔다. 높고 푸른 하늘에서, 산들산들 불어오는 바람에서, 그리고 시민들의 옷차림에서. 도심의 실개천에도 가을 옷을 갈아입은 갈대가 고개를 내밀고 있다. 그렇게 익어가는 가을, 추석 명절의 긴 연휴가 시작되었다.
톨스토이의 단편소설 ‘사람에게는 땅이 얼마나 필요한가’는 인간의 끝없는 욕심이 결국 어떤 비극을 초래하는지를 날카롭게 고발하는 작품이다. 주인공 파훔은 평범한 농부로, 처음에는 가족이 먹고살 만큼의 땅만을 원했지만, 점점 더 많은 땅을 소유하고 싶어 하는 욕망에 사로잡히게 된다. 작중에서 그는 좋은 땅을 얻기 위해 마을을 떠나고, 결국 바시키르 족의 땅을 헐값에 얻을 기회를 잡는다.
바시키르 족은 특별한 거래 조건을 제시한다. 단 하루 동안, 해가 지기 전까지 자신이 걸어서 표시한 만큼의 땅을 줄 것이며, 단 해가 지기 전까지 돌아오지 못하면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파훔은 가능한 한 많은 땅을 얻기 위해 무리해서 먼 거리를 돌며 표시하지만, 해가 지기 직전에 겨우 출발점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과도한 욕심으로 인한 무리는 그의 생명을 앗아가고, 결국 그는 그 자리에서 죽는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인 “사람에게 필요한 땅은 단지 그의 시신을 묻을 만큼의 크기일 뿐이다”는 인간의 삶과 욕망에 대한 냉철한 통찰을 담고 있다.
이 작품을 통해 톨스토이는 인간이 왜 끝없는 욕망에 휘둘리는지를 묻고 있다. 파훔은 처음부터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성실하고 근면했으며, 가족을 생각하는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조금 더 넓은 땅이 있다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단순한 생각이 점점 탐욕으로 변질되면서, 그는 결국 자기 파멸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이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현대 사회에서도 우리는 끊임없이 더 나은 것을 추구한다. 더 좋은 직장, 더 큰 집, 더 많은 재산을 위해 살아간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잃고 있는가? 파훔처럼 건강을 잃고, 인간관계를 잃고, 결국 자신을 잃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소설은 그러한 삶의 방향에 대해 우리 스스로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톨스토이의 문체는 간결하면서도 강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작중의 사건은 단순하지만, 그 안에 담긴 상징성과 풍자는 매우 깊다. 특히 파훔이 땅을 표시하며 점점 더 멀리 가는 장면은 인간의 욕심이 얼마나 끝이 없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이미 충분한 땅을 확보했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만 더’라는 생각에 걷고 또 걷는다. 그 끝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원하는 땅이 아니라, 죽음뿐이었다.
이 작품을 읽고 난 후, 나 자신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지금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가? 지금 내가 추구하는 목표는 정말로 내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주는가? 아니면 단지 더 많은 것을 갖기 위한 욕심일 뿐인가? 이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해보려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나는 욕망이란 적절히 조절되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나를 삼킬 수 있다는 중요한 교훈을 새삼 얻었다.
결국, 톨스토이는 이 작품을 통해 인간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많은 것’이 아니라 ‘충분한 것’임을 말하고 있다. 인간은 필요한 만큼만 가지면 된다. 오히려 너무 많은 것은 짐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는 더 많은 것을 소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소박한 삶 속에서 진정한 행복과 의미를 찾기 위함이 아닐까?
‘사람에게는 땅이 얼마나 필요한가’는 단순한 우화를 넘어, 인간의 본성과 사회의 모습을 꿰뚫는 통찰이 담긴 작품이다. 짧지만 깊은 울림을 주는 이 작품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꼭 한번 읽어봐야 할 가치가 있다. 그리고 그 메시지를 마음속에 새긴 채, 우리 삶의 방향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는 독서가 될 것이다.
톨스토이 단편 소설을 읽은 후, “나의 인생 후반전은 언제부터였는가? ”라고 자문자답했지요. 모두가 다르겠지만, 저는 지금까지의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결론은 ‘나의 인생 후반부’는 오늘, 지금 이 시간 이후라는 것을 새롭게 인식한 것이지요. 70대 중반이 지난 사람이, 지금 이 시간 이후부터가 ‘인생 후반부’라고 한다면 의아해 할 수도 있겠지만, 시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행동이 따르는 사고의 전환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누구든지, In put 없이 Out put 만 작동 한다면, 곧 과거의 경험으로 ‘자신의 확신’만 쏟아낸다면 그는 전형적인 ‘꼰대’의 틀에서 벗어날 수 없겠지요. 새로운 경험과 작은 도전을 통해 체득하는 것이 삶의 지혜이고, 그것을 공유할 수 있을 때 사유의 세계는 신선한 삶으로 이어지지 않을까요.
계절의 탓인지 묻득, 오래 전 보았던 두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마지막 장면을 기억하십니까? 노인이 된 라이언이 전우들의 묘지 앞에서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이내에게 묻습니다. “나... 잘 산 것 같아?”. 국제시장에서 주인공 덕수는 평생을 고생하며 가족을 위해 살다가 늙어 아버지가 입던 옷을 껴안고 중얼거립니다. “아버지, 저 잘 살았지요? 그런데 억수로 힘들었어요. ...” 저에게 이 두 장면은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은 모습으로 남았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마지막 순간, 자신의 삶의 돌아보며 자문자답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하신 말씀과는 다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