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Whom the Bell Tolls(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by 김종복(요셉) posted Oct 01,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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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or Whom the Bell Tolls(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가을을 알리는 소슬바람은 지난 여름의 무더위를 잊을 만큼 상쾌하다. 해마다 이맘때면 자아(自我)가 형성된 고향의 벼이삭, , 수수도 그 바람에 춤추며 알알이 익어갔을 것이다. 문득 목덜미로 훅 불어 드는 바람에도 그리움에 사무치고, 어두운 수풀 뒤에서 울어대는 풀벌레 소리에 잊었던 추억들이 희미하게 떠오르며 향수에 젖는다. 굴곡진 삶의 세월과 함께한 육신은 황폐하고 쇠약해지건만 마음은 잘 익은 돌감처럼 몰랑몰랑해지는 계절이다. 유독 지난여름의 잔혹한 더위를 다 같이 이겨낸 모든 이들이 전우(戰友)처럼 애틋하다. 오래전 촛불로 날아들어 타죽는 벌레들을 보다 못한 석가모니가 제자들에게 무언가 씌울 것을 명하여 등룡(燈籠)이 생겼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작은 것들을 보살피는 고운 마음씨까지도 닮고 싶어지는 아름다운 가을밤이다. 등화가친(燈火可親)이라 했던가! 깊어가는 가을밤에 누군가에게For Whom the Bell Tolls’(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이야기를 공유하는 것도 의미 있는 추억이 될 것이다.

 

헤밍웨이 걸작, <무기여 잘 있어라>는 제1차 세계대전 중 이태리 전선을 배경으로 쓴 작품이라면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스페인 내전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헤밍웨이는 전쟁이 있는 곳이라면 세계 어느 곳이듯 위험을 무릅쓰고 달려갔다. 1차 세계대전처럼 군인으로 직접 참가한 적도 있고, 군인으로 참가할 수 없을 때는 전쟁을 취재하는 특파원 자격으로 참가했다. 2차 세계대전 중에는 특파원인데도 영국 공군 비행기에 탑승하고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 직접 참가하며 파리를 탈환하는데 앞장서는 등 일반 정규군 못지않게 활약했다. 헤밍웨이는 왜 피에 굶주린 늑대처럼 이렇게 전쟁터를 쫓아 다녔을까? 헤밍웨이는 전쟁이야말로 작가가 작품을 쓰는데 가장 좋은 소재라고 밝혔다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여러 종류의 전쟁 중에서도 특히작가에게 가장 좋은 전쟁은 내전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모르긴 몰라도 한 나라 안에서 민족끼리 벌이는 내전이 국가와 국가 사이에서 일어나는 국제적인 전쟁보다 훨씬 더 극적이고 비극적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동족상잔의 비극 한국전쟁을 보면 쉽게 이해가 간다.

 

주인공 로버트 조던은 작중(作中)에서스페인 같은 나라는 이 세상에 없죠.”라고 말한다. 그러자 옆에 있던 페르란도가 당신 말이 맞아요. 이 세상 어딜 가도 스페인 같은 나라는 없어요.”라고 대답한다. 로버트 조던의 이 말은 작가 헤밍웨이의 말로 받아들여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헤밍웨이는 스페인 내전이 일어나자 좌파 공화국 정부를 지원하기 위하여 자금을 모금하는데 누구보다도 앞장섰다. 그는 통신사의 특파원 자격으로 직접 스페인을 방문하여 내전을 취재했다. 헤밍웨이는 어떤 의미에서 고국보다도 더 사랑한 스페인을 위해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 썼을지도 모른다. 주인공 로버트 조던은 개인의 사사로운 이익이나 안녕을 포기한 채 오직 공동선을 이룩하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인다. 미국인인 그는 미국 중서부에 있는 대학에서 스페인어를 강의했으며 스페인 내전이 일어나자 미국과 유럽의 많은 지식인들이 그러했듯, 로버트 조던도 휴가를 내고 내전에 참가하여 파시스트에 맞서 공화파의 대의명분을 위해 싸웠다. 그는 특별한 정치적 신념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가 평소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들을 고통과 비참에서 해방시키는 것이 삶을 보람 있고 가치 있게 살아가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면서 그가 공화 정부 편에서 싸우는 것은 오직 파시즘을 증오하기 때문이다. 사실 스페인 내전은 독일의 나치주의와 소련의 공산주의 그리고 이태리의 파시즘 등 유럽의 온갖 정치 이데올로기가 서로 다투는 이념의 각축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스페인 내전은 우파와 좌파 같은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두고 다툰 싸움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로버트 조던은 그가 속해 있는 공화파 사령부로부터 세고비아 공격의 사전 차단 단계로 다리를 폭파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가 다리를 폭파하는 임무를 맡게 된 것은 다이너마이트를 다루는 기술이 있었기 때문이다. 로버트는 안셀모라는 노인의 안내로 과다라마 산맥의 산중에 숨어 있는 공화파 유격대원들을 찾아간다. 산중에서 유격대원을 이끌고 있는 사람을 파블로이다. 작전지에 도착한 로버트 조던은 자신이 다리를 폭파하는 과정에서 살아남기 힘들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특히 유격대장인 파블로의 아내 필라르는 그의 손금을 보고 직감적으로 그의 죽음을 알아차린다. 그녀가 마리아라는 젊은 아가씨를 로버트와 가깝게 하도록 일부러 유도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그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필라르의 행동은 파시스트들에게 끌려가 능욕(凌辱)을 당한 마리아를 정신적으로 치유해 주기 위한 시도로 볼 수 있다. 파블로와 엘소르도를 비롯한 다른 유격대 대원들도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들의 죽음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로버트가 파괴하도록 명령받은 철교는 이 소설에서 원의 중심과 같은 역할을 한다. 소설의 사건은 이 다리를 중심으로 원심적으로 점차 넓게 확산된다. 한 계곡에 걸려 있는 이 조그마한 다리는 마치 물 위에 퍼지는 파문처럼 과다라마 산맥을 넘어 스페인으로 퍼지고 스페인을 넘어 다시 유럽으로 퍼진 뒤 온 세계로 퍼져 나갈 것이다. 로버트는 비록 자신을 포함하여 안셀모와 페르난도의 죽음이라는 희생을 치렀지만 결국 다리를 폭파한 것에 대해 자못 가슴 뿌듯하게 느낀다. 그의 자부심은 이번 일에 대해 할아버지에게 이야기하고 싶구나. 할아버지도 아마 사람들을 찾아내어 이만큼 멋지게 일을 해내지는 못했을 거야.”라는 말에서도 단적으로 들어나듯 공동선을 위해서라면 라는 개인을 기꺼이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다고 말한다. 유격대원들이 활동하고 있는 과다라마 산맥의 언덕과 계곡 시냇가에 아련히 피어오르는 안개처럼 죽음은 이 작품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죽음이란 인간에게 그림자처럼 피할 수 없는 운명이요 늘 그의 주변에 가까이 있는 실체다.

 

그러나 로버트 조던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로버트 조던은 작품의 결말 부분에서 계획대로 다리를 폭파한 뒤 허벅지에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고통을 느끼면서 자살할까 하는 충동도 느끼지만 끝내 자살을 포기하고 적군을 한 사람이라도 처치하려고 애쓴다. 마리아를 비롯해 살아남은 대원들을 모두 떠나보낸 뒤 언덕 위에 홀로 남은 로버트 조던은난 아버지가 한 짓을(자살) 하고 싶지 않아. 나도 그 일은 잘해 낼 수 있겠지만 그런 짓은 하고 싶지 않아.”라고 되뇐다. 마지막 장면에서 다리에 부상을 당한 로버트 조던이 죽음을 맞는 것을 애석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제까지 그의 행동과 생각에 비추어 보면 어긋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가 죽음을 애석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가 바로 성취하여야 할 공동선과 대의명분(大義名分)이 있기 때문이다. 비록 죽음을 앞둔 시점에서 얻은 것이기는 하지만 로버트의 이러한 깨달음은 아주 값지고 소중한 것이다. 마침내 엘소르도 영감을 죽인 적군 중위가 나타나자 로버트는 그를 향하여 경기관총을 조준한 채 그가 좀 더 가까이 다가오기를 기다린다. 어차피 죽을 바에야 적군 한 사람이라도 더 죽여 공화국의 승리를 앞당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로버트에게 삶이란 궁극적으로 죽음을 향하여 한 걸음씩 나아가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더구나 그는 인간이 죽으면 그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로버트 조던처럼 죽음 이후의 내세(來世)에 대한 확신이나 기약이 없다면 인간은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까? 헤밍웨이의 주인공들이 흔히 그러하듯 로버트 조던도 될 수 있는 대로 현세의 삶을 충실히 살려고 애쓴다. 마치 단물을 모두 빨아먹고 뱉어 버리는 껌처럼 그는 이곳에서 지금’, 즉 지상에서의 삶을 만끽하려고 노력한다. 쾌락 주의자처럼 그가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고 섹스를 하는 등 감각적인 쾌락에 무게를 싣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로버트와 마리아의 성행위 장면은 이를 뒷받침한다. 엘소르도 영감을 방문하고 돌아오던 중 필라르는 젊은 두 사람을 뒤에 남겨 놓고 먼저 발길을 재촉하여 걸어간다. 두말할 나위 없이 두 사람에게 사랑을 나눌 기회를 주기 위해서이다. 로버트는 마리아와 성행위를 한 뒤 시냇가를 따라 걸어오면서 이 일을 두고 대화를 나눈다. “마리아, 난 당신을 사랑해. 당신이 너무도 귀엽고 황홀하고 너무도 아름다워서 당신과 사랑을 나누고 있을 때는 그만 죽고 싶은 심정이었어.” “, 난 그때마다 죽는걸요. 당신은 죽지 않아요?”그녀가 말했다. “아니, 하지만 거의 죽어 가는 기분이지. 그런데 당신은 땅바닥이 움직이는 걸 느꼈어?” “그럼요, 느꼈어요. 죽어 갈 때도, 그 팔로 나를 껴안아 줘요.”

 

그런데 땅바닥이 움직였다는 것은-지축<地軸>이 흔들렸다는 것이다.- 비단 젊은 남녀가 섹스를 하면서 느끼는 격렬한 감정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더 나아가 흙냄새 물씬 풍기는 대지와 살갗을 맞대고 함께 호흡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이와 관련하여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시작과 마지막 장면을 보면, 작가는 두 장면에서 유난히 소나무 숲과 그 바닥에 깔린 솔잎을 강조한다. “그는 갈색 솔잎이 깔린 숲 바닥에 두 팔을 포개고 그 위에 턱을 고인 채 납작 엎드려 있었다.”로 시작하고 대단원의 마지막에그는 심장이 숲에 깔려 있는 솔잎에 부딪쳐 고동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라는 문장으로 막을 내린다. 여기서 주인공의 감각은 소나무와 솔잎은 곧 스페인의 대지로 이어지고, 스페인의 대지는 감각적이고 구체적인 삶으로 이어지며, 감각적이고 구체적인 삶은 다시 대자연의 삼라만상(森羅萬象)으로 이어진다고 상상의 나래를 폈다.

 

따지고 보면 마리아는 로버트가 자아(自我)를 실현하는 데 산파적인 역할을 한다. 마리아와 사랑을 통해 로버트는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 속에 자신을 잃어버리고 합일(合一)을 이룬다. 로버트가 마리아와 한 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두 사람이 헤어지는 마지막 장면에서 단적으로 엿볼 수 있다. 그는 마리아에게 이제 당신이 곧 나야.”라든지 “(당신과 함께) 정말로 나도 가는 거야.” 라고 말하면서 어서 늦기 전에 파블로 일행과 안전한 곳으로 피하라고 설득한다. “당신 속에서 우리 둘은 함께 가는 거지. -중략- 이제 얌전하게 내말 잘 듣고 있군. 내게가 아니라 우리 두 사람에게지. 당신 속에 있는 내게 말이야. , 이제 우리 둘을 위해 어서 가. 정말이야. 이제 우린 당신 안에서 함께 가는 거야.” 위 인용문에서 당신 속에서 우리 둘은 함께 가는 거지. 당신 속에 있는 내게 말이야.”라는 문장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주인공 로버트 조던은 마리아의 몸속에 자신이 들어 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로버트는 이제 자신과 마리아는 하나일 뿐 서로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다. 헤밍웨이가 많은 이름 중에서 그녀의 이름을 하필이면 마리아로 붙였는지 이제 알 만하다. ‘성모 마리아는 인류의 어머니요 교회의 어머니로 숭앙(崇仰)받는다. 작가가 이 소설의 인물 마리아성모 마리아와 관련짓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스페인 내전은 19394월 공화파 정부가 마드리드에서 항복하여 프랑코 측의 승리로 끝이 났다. 3년여 동안 계속된 이 내전으로 스페인 전역은 황폐화되었다. 이 소설의 제목에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일반적인 종이 아리라 누군가가 죽었음을 알리는 조종(弔鐘)을 가리킨다. 또한 이 작품의 시간적 배경은 광범위 하지 않다. 중심 사건은 스페인 내전이 발발한 이듬해인 19375월 마지막 주 나흘 낮과 밤 안에 일어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핵심적 사건은 토요일 오후에서 그다음 주 화요일 정오까지 벌어진다. 900여 쪽의 방대한 소설에서 실제 사건이 일어나는 시간은 겨우 70여 시간밖에는 되지 않는 셈이다. 헤밍웨이가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서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내전을 둘러싼 사건을 압축하여 다루는 것은 작가의 역량이겠지만 무지한 나로서는 경탄(驚歎)하지 않을 수 없다.

-2024,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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